노동자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엄격히 판단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노란봉투법에 힘이 실리자 몸이 달은 정부가 선제적 선긋기에 나섰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18일 예정에 없던 보도참고자료를 내고 “해당 판결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의 근거가 될 수 없다”며 “우리 노사관계는 법을 준수하는 상생의 관계를 지향해왔는데, 이러한 노력을 후퇴시켜 불법파업을 조장하고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방식은 결코 용인될 수 없다”고 밝혔다. 판결이 나온 지난 15일 노동부가 낸 보도참고자료에서도 유사한 주장을 했다.
노조법 3조 개정안도, 대법 판결도
‘개인에 손배소 책임 제한’ … 노동부만 다르다?
노동부 주장의 핵심은 노조법 개정안은 공동불법행위에 대한 민법상 손해배상원칙(부진정연대책임)을 부정하고, 대법원 판결은 손해배상에 여전히 공동으로 연대책임을 지는 것이어서 법 개정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존 판례는 불법파업에 대한 노조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면 노조와 조합원 사이 민법(760조)이 정한 부진정연대책임(공동으로 불법행위책임 부담)이 성립한다고 봤다. 만약 불법파업으로 입은 손해를 100이라고 할 때 사용자는 노조에 100을 청구할 수도 있고, 조합원 100명에 1씩 청구할 수도 있다. 이런 제도를 악용한 사용자가 특정 조합원에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소 취하를 조건으로 노조 탈퇴나 권리 포기를 종용해 노조파괴 수단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현대차 손해배상 소송에서 핵심 쟁점은 노조의 쟁위행위로 손실이 발생했을 때 회사가 조합원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다. 대법원은 “노조 의사결정이나 실행행위에 관여한 정도 등은 조합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위법한 쟁의행위를 결정·주도한 주체인 노조와 개별 조합원 등의 손해배상 책임 범위를 동일하게 보는 것은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사안에 따라 책임 제한 정도를 개별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조법 3조 개정안도 유사하다. 개정안은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경우 각 손해의 배상의무자별로 귀책사유와 기여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책임 범위를 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제는 노동부의 해석이다. 노동부는 “해당 판결은 손해배상 책임이 있는 자는 여전히 공동으로 연대책임을 지게 한다”며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불법 쟁의행위로 인한 손해액 분담 비율을 공동불법행위자 간 달리 정할 수 있다는 것으로, 예외를 규정한 것”이라는 주장했다. 반면 노조법 3조 개정안은 공동불법행위에 대한 민법상 손해배상원칙을 부정하는 것이어서 대법원 판결이 법 개정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선고 당일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이번 사건 쟁점은 책임 범위 단계의 문제”라고 강조한 바 있다. 불법공동행위 성립 단계에서 개별 조합원의 책임이 인정된 경우라도, 책임범위 단계에서 모든 책임을 부담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조에서의 지위와 역할 등을 고려해 책임의 정도에 따라 손해액을 일일이 산정해 개별 판단하라는 취지다. 노조법 3조 개정안 역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용우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과 노조법 3조 개정안 취지나 문구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다”며 “노동부가 노조법 개정에 탄력이 붙자 노조법 개정안은 부진정연대책임을 부정하고, 대법원 판결은 전제하고 있다는 억지 해석을 재차 발표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기호 민주노총 법률원장도 “대법원 판결은 손해액의 전부를 책임지우는 부진정연대책임과는 양립할 수 없다”며 “노조법 역시 책임 범위 단계에서 대법원이 판시하고 있는 기준 등 책임의 정도에 따라 손해액을 다르게 정하라고 한 것이므로 대법원 판결과 같은 취지”라고 말했다.
국민의힘, 대법원 때리기로 사법부 폄훼
노동부 주장과 달리, 국민의힘은 이번 대법원 판결이 노란봉투법을 뒷받침한다고 본다. 그래서 판결을 내린 주심 노정희 대법관에 대한 도 넘은 흠집내기로 논란을 사고 있다.
윤재옥 원내대표는 판결 다음날인 16일 오전 국회 본청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대법원 판결은 불법행위에 대한 기업 손해배상 청구를 원천 제한하는 판결이다. 노란봉투법을 판례로 뒷받침하며 국회의 쟁점 법안을 임의로 입법화하는 결과를 빚었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에서 여야 간 입법을 두고 입장 차이를 보인다면 법원은 관련 판결을 유예하고 국회의 논의를 지켜보는 게 상식”이라며 판결을 내린 시기를 문제 삼았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도 같은날 자신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공동불법행위의 기본법리조차 모르고 가해자와 피해자 구분조차 못하는 노정희 대법관은 법관 자격이 없다”고 밝혀 ‘도 넘은 사법개입’ 비판이 일었다.
노조법 2·3조 개정안은 이르면 이달 말 본회의에 부의돼 다음달 표결이 예상된다. 5월24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야당 주도로 통과한 본회의 부의 요구안은 국회법에 따라 30일이 지난 후 처음 열리는 본회의에서 부의 여부를 무기명 투표로 결정할 수 있다. 29일이나 30일에 본회의에서 부의되면 7월 본회의에서 투표가 이어질 수 있다. 대법원 판결로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명분이 사라졌다는 목소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