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위원회가 지부·지회의 집단탈퇴를 금지한 산별노조 규약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정부가 산별노조 규약을 손보겠다고 나선 데 대해 노동위가 제동을 거는 대신 산별노조에서 기업별노조로 쉽게 전환하도록 물꼬를 터준 셈이다. 산별노조 흔들기가 본격화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지부·지회 = 산별노조 하부조직’ 여부가 쟁점
“노동위 정부 거수기 역할” 비판
13일 노동계에 따르면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12일 고용노동부가 집단탈퇴를 금지한 금속노조·사무금융노조 규약이 노조법을 위반했다며 시정명령 의결을 요청한 것을 받아들였다. 노조법 21조1항에 따르면 행정관청은 노조의 규약이 노동관계법령에 위반한 경우 노동위 의결을 얻어 그 시정을 명할 수 있다.
노동부는 지난 2월 금속노조·사무금융노조·공무원노조의 규약에 대한 시정명령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집단탈퇴를 금지하는 규약을 근거로 지부·지회의 조직형태 변경을 막는 것은 위법하다고 보고 시정명령 절차를 밟은 것이다. 금속노조가 기업노조 전환을 추진한 포스코지회(포항) 임원 등을 제명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사무금융노조와 공무원노조의 경우 각각 한국은행노조·금융감독원노조 탈퇴와 원주시지부 탈퇴로 인해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이다.
쟁점은 지부·지회를 산별노조의 하부조직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다. 산별노조 체제에서 지회·지부는 노조의 하부조직으로 노조법상 노조가 아니다. 조직형태 변경에 대한 권한도 지부·지회가 아닌 산별노조에 있는 이유다. 다만 발레오만도지회 금속노조 탈퇴사건을 다룬 2016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회의 독자성을 인정해 조직형태 변경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노동부는 해당 판례를 근거로 집단탈퇴를 금지한 산별노조 규약이 노조법 5조1항과 16조1항8호를 위반한 것이라고 봤다. 서울지노위의 구체적인 판단 근거는 판정문이 송달된 이후에 확인할 수 있다.
노조는 노동부 판단에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다. 박현희 공인노무사(금속노조 법률원)는 “지부·지회가 비법인사단으로서 실질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는 운영실태를 보고 판단을 해야 하는데 대법원 판례를 왜곡해서 산별노조를 연합단체로 전제하고 시정명령 의결 요청을 한 것”이라며 “(심판회의에서도)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비법인사단인 하부조직이 많을 것’이라는 추정에 근거해 주장했다”고 비판했다.
노동위원회가 ‘노조 때리기’에 나선 노동부의 거수기 역할만 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금속노조는 이날 성명을 내고 “심판회의에서 노동부는 금속노조의 규정에 의한 침해사례나 실태를 조사한 것은 없다고 시인했다”며 “그런데도 노동위는 제대로 된 조사나 입증 없이 노동부 시정명령 요청을 의결했다. 노동부가 요청하면 다 의결하는 기관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자인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서울지노위 판정서가 나오면 서울고용노동청은 이에 따라 금속노조와 사무금융노조에 위법한 규약을 시정하라고 명령할 것으로 보인다. 금속노조와 사무금융노조는 실제로 행정관청이 노동위원회 의결을 가지고 시정명령을 내리면 행정소송을 진행한다는 입장이다.
“산별노조 형해화 우려”
지부·지회의 집단탈퇴를 이렇게 ‘쉽게’ 만들어 놓으면 결국 산별노조가 형해화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김기덕 변호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는 “대법원 판례는 (일정 요건을 충족한) 지부·지회가 조직형태 변경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취지이지 산별노조의 ‘집단탈퇴 금지’ 규약 자체가 노조법 위반이라고 본 것이 아니다”며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해당 규약 자체가 노조법 위반이라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노동부·노동위의 판단과 결정은 산별노조를 무력화하고 형해화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집단탈퇴로 인한 피해는 개별노동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현희 노무사는 “집단탈퇴시 당장 단협 적용부터 피선거권 등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이에 따르는 위험은 개별노동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 때문에 집단적 결의를 통한 조직형태 변경은 유효성 검토 등을 통해 신중하게 다뤄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노동부는 3개 노조 뿐만 아니라 화섬식품노조 규약에 대해서도 지난달 노동위에 시정명령 의결을 요청한 상태다. 이번 노동위 결정이 공무원노조와 화섬식품노조 규약에 대한 위법 소지 여부 판단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