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정신건강, ‘마상의 산재’로 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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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담당자 댓글 0건 조회 1,795회 작성일 19-10-11본문
노동자의 정신건강, ‘마상의 산재’로 챙기자
정신질환 평생 유병률 13%, 산재인정은 ‘연 200건’ 불과 노동자 정신건강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조직문화’ 필요
[리포트] '마상'도 산재가 되나요?
‘회피’는 심리적 방어기제 중에서 가장 건강한 방법이라고 평가받는다.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 자체에서 거리를 유지하는 단순하고도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사회생활은 녹록지 않다. 회피할 수 없는 상황에 종종 처하게 된다. 그럴 때면 한참을 괴로워하다가 ‘상상’의 나래에 빠지기도 한다. 흔히 이렇게 표현된다. “이번 주 로또 당첨되면 회사 때려 치울 거야!”
한국의 대다수 직장인은 ‘퇴사충동’을 앓고 있다. 힘겹게 ‘헬조선’의 취업문을 뚫고도 ‘퇴사’를 입에 달고 사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올해 3월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직장인 1,20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직장인의 91%가 퇴사를 고민한 적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말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퇴사를 고민한 91%의 4분의 1만이 퇴사를 선택했다. 일터에 불만이 있음에도 대다수는 그저 버티며 참는 것이다.
무턱대고 참기만 하면 병이 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6년도 정신질환 실태조사에 따르면, 정신질환 평생유병률은 25.4%로 나타났다. 알코올, 니코틴 사용장애를 제외해도 13.2%에 이른다. 100명 중 13명은 평생 동안 한 번 이상의 정신질환을 앓는다. 생산가능인구(15~64세)로 대상을 좁히면 이 비율은 소폭 상승한다. 정신질환이 꽤 흔한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질환을 이유로 산재를 신청한 사람은 226명(2018년 기준)에 지나지 않았다. 신청자 수가 200명이 넘은 것도 작년이 처음이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퇴사충동은 일터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를 제때 풀지 못한 노동자의 심리적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정신과 가는 게 어때서… 정신질환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기까지
아직 우리에게 노동자가 일을 하다가 정신질환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은 낯설다. 더군다나 정신질환을 이유로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육체적 질환과는 다른 정신질환 자체의 특성이 작용한 결과다.
정신질환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이하 PTSD)와 같은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대다수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발병한다. 그렇지만 다수의 연구들은 정신질환의 주요한 원인으로 내인성(內因性), 개인의 선천적인 특질을 지목한다. 개인의 ‘유전적인’ 특질이 정신질환 발병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누구라도 특정한 상황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으면 정신질환에 걸릴 수 있다. 특별한 누군가만 정신질환에 걸린다는 말은 편견이다.
정신질환의 이러한 편견은 정신질환의 산재인정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시민건강연구소에서 발행한 영펠로우 이슈페이퍼 <정신질환은 어떻게 산재가 되었나>(류한소, 2018)에서는 “특정한 질병을 업무상 질병으로서 인정하는 것은 사회적 합의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정신질환의 산재 적용 여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산업재해 보상보험법’(이하 산재보험법)에 명시된 정신질환은 PTSD다. 2013년 7월 산업재해 보상보험법 시행령에 등재됐다. 이는 2005년 선로투신을 목격한 도시철도 노동자의 공황장애가 산재로 인정된 이후, 업무에서 겪는 ‘외상적 사건’ 때문에 정신질환이 걸릴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서서히 퍼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2016년 산재보험법 시행령에 ‘적응장애 및 우울증’, 2019년 산업안전보건법에 ‘직장 내 괴롭힘’이 추가된 것도 각각 ‘감정 노동’과 ‘직장 갑질’ 등의 이슈로 업무상 과정에서 노동자의 정신건강이 침해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2013~2018년 정신질환의 산재 신청과 승인 현황. 자료 = 근로복지공단
특히 정신질환 산재인정의 추세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극적으로 담아낸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이하 질판위)에서 정신질환의 산재를 인정한 비율은 2013년 33.6%에서 2015년 30.7%까지 떨어졌다가 꾸준히 상승해 2018년 73.5%에 달했다.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정신질환의 산재를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가 불과 4년여 만에 급격히 변한 것이다.
물론 2005년 이전에도 노동자들의 정신질환 문제는 줄곧 있었다. 하지만 ‘업무상의 원인’이라는 프레임으로 정신질환이 해석되지 않았다. 이슈페이퍼에서는 1999년 대우국민차 창원공장 노동자 ‘이상관 투쟁’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이상관 씨는 허리를 다쳐 산재요양을 받던 중 ‘IMF 고통분담 대책’의 일환으로 충분히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직장에 복귀한다. 이 씨는 아픈 몸 때문에 복귀한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이 사건은 “부당한 요양 종결”이라는 프레임으로 해석됐다. 산재복귀 노동자의 업무 부적응에 따라 정신질환이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너무 ‘무거운’ 정신질환 산재신청
하지만 정신질환 산재를 신청하는 사람 수는 절대적으로 미미하다. 질판위는 전국에 6곳이 있지만 정신질환의 판정은 서울에서만 받을 수 있다. 1년에 200여 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감정노동, 직장 내 괴롭힘 등으로 업무상 스트레스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음에도 정신질환의 산재신청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김인아 한양대 보건대학원 직업환경의학교실 교수는 정신질환을 이유로 산재를 신청하는 일이 여전히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부당노동행위나 상사의 폭언 등 회사에서 발생한 폭력으로 말미암아 정신질환의 산재를 신청하는 경우 당사자의 상당한 심리적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업무상 산업재해의 입증 책임은 신청자에게 있다.
“회사에서 발생한 괴롭힘 때문에 산재로 인정받았다고 하면, 회사와 관계가 안 좋은 경우가 많아요. 왜냐하면 당사자는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회사는 그게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죠. 그걸 입증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당사자들이 너무 힘들어 해요. 또 ‘그 정도 가지고 정신질환 생겼다고 산재신청을 하냐’ 이렇게 되면 당사자는 다시 취업하기 어려운 일종의 문제아처럼 찍히게 되는 거죠. 그래서 회사를 그만둘 각오가 아니면 산재신청을 못해요. 실제로 나중에 확인을 해보면 회사를 이미 그만둔 경우도 흔하죠.”
더불어 김 교수는 정신질환 자체에 대한 사회적 시선도 산재 신청을 꺼리게 하는 이유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일반적인 경우 누구나 우울증이 있고, 직장에서 일이 너무 많아 우울증이 심해질 수도 있어요. 이때 3개월 정도 쉬면 괜찮아질 수 있죠. 그런데 이런 요청을 쉽게 회사에 할 수 없잖아요.”
산재보험은 잘잘못을 가려주지는 않는다
산재보험에 대한 과중한 사회적 이미지도 정신질환의 산재신청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요인이다. 본래 산재보험은 ‘무과실 책임’을 원칙으로 한다. 산재보험의 목적은 노동자가 고용주를 법정에 고발하기 위함이 아니다. 일을 하다가 다친 노동자에게 일정 수준의 소득과 의료급여를 제공하는 보편적 사회보험제도일 뿐이다.(우딩, 레벤스타인(2007), 노동자건강의 정치경제학; 이슈페이퍼에서 재인용)
하지만 사회적 시선은 마치 특정한 ‘가해자’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 산재를 신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법적 소송처럼 누군가의 ‘잘못’이 있기에 산재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김인아 교수는 산재보험의 철학은 그런 게 아니라고 지적했다.
“산재보험의 보상은 실비보험이란 걸 생각하시면 돼요. 정신적 충격에 대한 위자료를 주는 게 아니죠. 아파서 치료받는 데 필요한 치료비와 그 동안 일하지 못한 기간에 대한 수입을 주는 보험이에요. 산재보험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하는데, 노동자, 사업자, 일반인 모두 산재 승인을 받았다고 하면 위자료를 받은 줄 알아요. 산재보험은 무과실 책임 원칙입니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따질 수 없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자동차 보험처럼 생각하죠. 근로자 과실 몇 프로, 사업자 과실 몇 프로 이렇게.”
하지만 김 교수는 한국의 빈약한 건강보험 체계 때문에 산재에 대한 지나친 의미가 부여되는 경향이 있다고도 지적한다.
“나라마다 제도가 달라요. 외국은 정신질환 산재인정을 안 해주는 이유가 있어요. 노동자 입장에서는 산재 신청을 하든 건강보험을 받든 100만 원을 받거나 80만 원을 받는 차이밖에 되지 않죠. 사실 외국도 산재를 신청한다고 회사와 갈등을 만드느니 정신질환 특성 상 건강보험에 따라 치료받고 휴업급여 받는 게 더 이득일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니잖아요. 산재가 안 되면 소득이 보전이 안 돼요. 병가도 없어요. 유급 병가라는 게 법적으로 정의가 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있는 회사도 길어야 두 달이죠. 그렇다 보니까 산재가 더 격해질 수밖에 없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영국‘O’사의 제산제 광고를 패러디해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됐던 “퇴사 짤방.” 거의 모든 직장인들이 퇴사를 꿈구지만, 생각을 실제로 옮기는 사람은드물다.
‘감정노동’, ‘직장 내 괴롭힘’, ‘태움’ … 이름보다 중요한 건, 노동자의 정신건강 관리
극히 낮은 정신질환 산재신청과는 별개로 노동자의 정신건강 문제에 대응하는 입법 활동은 활발하다. 올해 7월 16일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시행됐고 지난해 10월 16일에는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시행됐다. 불과 8개월 만에 보완입법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노동자의 정신건강을 침해하는 사건은 끊이질 않는다. 2014년 12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으로 ‘직장 갑질’ 사례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더니, 지난해 7월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엽기적인 행각이 밝혀졌다.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피해 사례들이 쏟아지고 있다. 입법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반증이다.
‘감정노동보호법’ 제정 기초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던 김인아 교수는 ‘노동자의 정신건강 관리’라는 본질은 놔두고 이슈가 되는 사건만을 대응하는 입법적 움직임을 비판했다.
“노동자의 정신건강을 침해하는 요소가 한두 개입니까? 감정노동 말하니까 감정노동법 만들고, 직장 내 괴롭힘 하니까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만들고. 다음에 업무과중 문제되면 업무과중법. 이렇게 계속 만들 수는 없어요. 요지는 ‘노동자의 정신건강 스트레스를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 ‘어떻게 예방하고 관리할 것이냐’인데, 큰 그림이 없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안 마다 하나씩 추가하는 게 문제가 있다고 이미 제기했죠. 사건이 생기면 그 사건 하나하나를 다 리스트업 할 거냐고요.”
이슈페이퍼에서도 “고객에 의한 폭언과 상사의 폭언 중 노동자의 정신건강에 더 심각한 폐해를 끼치는 요인은 무엇일까? 결국 두 가지를 다 겪어야 하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PTSD, 감정노동, 태움, 직장 내 괴롭힘 등 노동자가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 개별적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업무상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노동조건 자체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올해 시행돼 산업안전보건법에 명시된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개념도 완전하지 않다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외국에서는 작업장 폭력(work place violence)과 작업장 괴롭힘(work place harrassment)을 구분해요. 폭언 이런 경우는 작업장 폭력에 가까워요. 근데 우리나라는 그걸 묶어서 보고 있는 거죠. 작업장 폭력과 괴롭힘이 범주화돼서 컨트롤하는 게 맞죠. 그런데 우리는 폭력의 문제가 너무 크다보니 폭력이 전부 괴롭힘으로 정리되는 듯해요. 어떤 분들이 보기에는 ‘괴롭힘이니까 그냥 왕따 이런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고, 어떤 분이 보기에는 ‘폭력이나 폭행이 동반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양 집단이 드러나고 있는 거죠.”
고용노동부가 만든 홍보용 카드뉴스. 굳이 ‘감정노동자’에 국한될 필요가 없다. 어떠한 일을 하다가 마음의 병이 생겨도 산재보험에 가입돼 있다면인정받을 수 있다. ⓒ 고용노동부
마상도 산재가 된다
‘마음의 상처’를 이유로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으려면 두 가지 사회적 인식이 전제돼야 한다. 먼저, 일을 하다가 누구나 정신질환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수한 누군가만 정신질환에 걸린다는 사회적 편견이 줄어야 한다. 두 번째는 산재인정이 누군가의 잘잘못을 가리는 게 아니라, 단지 일하다 아파서 병원비와 생계비를 보장 받는 정도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산재보험에 가입된 노동자는 누구나 업무상의 이유로 병원에 가게 되면 산재보험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정신질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육체만큼 정신건강도 중요하다. 단지 노동자가 일터에서 마주하는 위험에 대해 사회적 차원에서 보상해줄 뿐이다.
그렇지만 ‘마상의 산재 인정’이 사회에 던지는 과제도 분명히 존재한다. 경직된 의사소통구조, 노동자를 일회용품으로 간주는 경영방침 등의 조직문화가 노동자의 정신건강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작업장 내 위험 요소’로 간주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슈페이퍼는 “특정한 유해 요인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과 같은 노동조건 자체가 노동자들의 ‘영혼을 갉아먹는’ 위험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인아 교수는 이를 위해 노동자의 정신건강을 지원하는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다들 한 번씩 위기에 봉착하기 마련이죠. 생애위기를 접해 우울감에 빠지면서 일에 집중을 못하는 노동자가 생길 수 있어요. 원인이 무엇이 됐든, 어떻게 노동자를 치료받게 하고, 어떻게 다시 업무에 적응시킬 것이냐 이런 체계가 없는 거예요. 이것을 ‘직장 내 정신건강 관리 프로그램’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아직 없어요. 유럽은 최근에 회사들이 번아웃 예방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요. 일본은 정신건강증진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상담뿐만 아니라 노동조건이나 업무조건, 업무분장 등을 고려해 치료적 지원이나 상담을 배치합니다. 복귀 시에도 단계적인 프로그램이 있어요. 이런 시스템이 있어야 하죠. 정신적 위기를 겪는 노동자들에 대한 회사의 대책이 필요한 거예요.”
진폐증부터 시작해 뇌심혈관계 질환, 근골격계 질환까지 산재보상법이 보장하는 질환이 확대될 때는 어김없이 노동자의 지속적인 요구가 밑바탕에 있었다. 산재로 인정되는 사례가 하나 둘 쌓이면서 법령에도 질환이 명시됐다. 그러면서 작업장 내 위험요소도 점차 사라졌다. 정신질환이라고, ‘마음의 상처’라고 다르지 않다. 정신질환의 산재신청이 하나하나 쌓일 때마다 ‘행복한 일터’가 조금씩 만들어진다. 그러니 버티고 버티다 퇴사하지 말고 당당히 말해보자. ‘마상’도 산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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