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육훈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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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담당자 댓글 0건 조회 2,138회 작성일 19-06-18본문
우리는 교육훈련이 필요하다
그 많던 배우고 싶은 마음은 누가 훔쳐갔나?
노동자 교육훈련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노동자도 사용자도 말이다. 고용안정성과 생산성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가 한꺼번에 잡힐 것 같기 때문이다.
정부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국가의 경쟁력이 당연히 올라가겠고, 고용안정성과 기업 경쟁력 강화는 곧 탄탄한 사회안전망 형성 효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손뼉이 서로 빗나가는 것 같다. 이러한 헛스윙에 배움에 대한 자발적 동기가 식어간다.
어떻게 이 손바닥들을 마주치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이 부족하기에 중요한 교육훈련이 잘 안 되고 있는 것인지 들여다보려 한다. 함께 들여다 봐주시길 부탁드린다.
예측은 너무나도 쉽게 빗겨나갔다. 노동자 교육훈련의 필요성에 대해 개인, 노동조합 관계자, 노동조합 조합원에게 물었다. 모두 필요하다고 답했다.
기업에서 교육훈련을 담당하는 관계자들에게도 물었다. 회사 내에서도 직원들은 교육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싶어 한다고 답했다.
OECD <국제 성인역량 조사> 등 노동시장에 진입한 성인의 역량을 분석한 조사를 봤을 때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점점 역량 수준이 낮아졌다는 결과를 봤다.
노동자들 스스로가 교육훈련에 대한 필요성을 내부적,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갖지 못하고 있다고 가정했었다.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노동자들이 느끼고 있는 교육훈련의 필요성이란 무엇인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지금 노동자들이 느끼고 있는 교육훈련의 상태는 우리 사회의 어떤 면을 비추고 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 직시하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할 노동자 교육훈련의 길도 열릴 것이다.
생존을 위한 노동자 교육훈련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생존이다. 그렇기에 노동에 필요한 능력을 키우는 것은 생존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사회가 원하는 인적자원의 정형에 맞출 수밖에 없다.
인터뷰한 개별 노동자들, 기업의 교육담당자들이 노동자 교육훈련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을 정리해보니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 교육훈련의 필요성을 말하며 시장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함을 강조했다. 시장에 도태되지 않게 자기의 능력을 개발해서 일자리를 잃지 않을 것을 원했다.
4차 산업혁명이라 지칭하는 산업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이었다.
혁신적인 기술 능력을 갖지 못하면 자신은 AI나 로봇에 대체되고 일자리를 잃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노동자 교육훈련은 일자리를 잃는다는 공포로부터 도망가는 것이다. 노동시장에서 자기 경쟁력을 갖춰 열패자가 되지 않겠다는 방어기제라는 말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노동자 교육훈련은 ‘나’라는 개인이 살아남기 위한 경쟁적 수단으로만 작용한다.
파편화된 노동자 교육훈련은 당사자가 어느 정도 안정적 위치에 올라서게 되면, 일자리를 잃을 위협에 노출되지 않은 단계에 들어서게 되면 노동자는 교육훈련의 동기를 잃는다.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노동자의 직무능력과 역량수준이 급격히 떨어지는 이유는 그런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생존을 위한 교육훈련이 아닌 노동자 교육훈련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정재요 정치학 박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노동구조가 급격히 변화하게 되는 만큼 4차 산업혁명 속에서 개별 노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고양된 교육훈련이 필요하다는 프레임의 차원에서 최근의 경향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터에서 교육훈련은 4차 산업혁명 담론과는 무관하게 지속가능한 노동과 일터의 민주화를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그런데 새삼 일터에서 교육훈련이 오늘날 4차 산업혁명과 결부돼 주목받게 되고 또 부각된다는 것은 좋은 노동을 위한 교육훈련의 본연적 의미를 또 하나의 경쟁수단으로 변질시키려는 시도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일터에서 교육훈련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경제성장담론과는 무관하게 작업장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노동에서 인간소외를 예방하는 것과 같은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층위에서 고찰돼야 한다. …
교육마저도 자본획득(일례로 우리의 교육현실에서 ‘영어’는 과연 무엇인가? 단순한 언어인가? 수능 외국어영역 과목인가? 아니면 자본인가?)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의 기능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요원한 일인지도 모른다. …
교육훈련을 비단 노동자 자신의 직무능력 향상 차원이나, 성과에 대한 금전적 보상의 차원에서만 바라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것을 보다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노동의 인간화’로 간주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다소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작업장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일터에서는 노동자들이 노동소외를 극복하고 생계유지의 방편을 뛰어넘는 자아실현의 공간으로 노동현장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정재요 교수의 답변을 핵심만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생존을 위한 노동자 교육훈련이 아닌 일터에서 노동자가 소외되지 않고 행복하기 위한 교육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시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노동자는 일터에서 어떻게 소외받았고, 소외받지 않기 위한 교육훈련은 무엇인가?
인간이 배제당한 일터
최영섭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하 직능원) 선임연구위원은 그간 노동자가 일터에서 어떻게 소외됐는지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철학적으로 보면 노동이라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나를 실현해나가지 않는 노동이 많다. 택배 이야기를 해보자.
아마존에서 택배를 포장하는 기계가 나와 몇 십 명의 일자리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포장하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1년 열두 달을 포장만 하고 있는 거다.
그게 뭔가? 그게 나의 자아를 실현하는 건가? 전혀 상관없다. 그런 것은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포장을 해도 좋다. 하지만 단순반복적인 포장이 아닌 경우다.
예를 들어 책 제본하는 분들의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이 분들은 예술 제본을 하시는 분들이다. 파리에도 계시고, 파주에도 계신다.
이 분들은 책 제본을 두고 예술적인 제본을 위해 엄청난 고민을 하면서 결과물이 나왔을 때 성취감을 느낀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의 노동은 우리를 실현하는 노동이 될 것이다. 노동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거다. 노동이 삶이 되는 거다.”
영화 모던 타임즈의 컨베이어벨트 앞 찰리 채플린이 하는 것과 같은 단순반복적 노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적인 노동이 아닌 자기 노동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일터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동시에 최영섭 선임연구위원은 ‘이윤 편향적 기술 변화(profit biased technology change)’가 인간이 소외받는 일터를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윤 편향적 기술 변화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인간을 소외시킨다. 산업혁명 시기에 증기기관이 발명됐다.
석탄을 캐려고 들어갔는데 물이 나와서 물을 퍼 올리기 위해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물을 퍼 올리는 것 자체의 고통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물을 효율적으로 퍼 올리면서 더 깊은 땅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자 체구가 작은 아이들이 탄광으로 들어가고 유소년 노동이 산업혁명 이후에 확 증가했다.
기계라고 하는 것은 인간 노동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측면인데 자본의 이윤으로 운영되는 순간 괴로움이 배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질문해봐야 하는 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의 발전을 현실에서 어떻게 이룰 것인가이다.”
최영섭 선임연구위원이 한 석탄 채굴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탄광을 깊게 파면서 왜 좁게 팔 수밖에 없었을까.
깊을수록 넓이를 넓게 파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넓게 파는 것이 이익에 비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답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성인에 비해 힘이 약한 아이들에게 석탄 채굴 노동을 시킬 필요가 없다.
나아가 물을 퍼 올리는 증기기관을 발명한 것도 인간이 물을 퍼 올리는 시간에 드는 비용이 석탄 채굴로 얻는 이익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이윤 중심적인 사고는 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배제한다.
인간이 일터에서 소외받지 않기 위한 교육훈련이란?
노동자가 일터에서 소외받지 않는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일터에서 노동자가 주체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과 같다.
노동자가 일터에서 주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노동을 시키는 대로가 아닌 자기 주도적으로 해나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생존을 위한 노동자 교육훈련만으로는 노동자가 자기 일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단적인 예를 최영섭 선임연구위원이 소개했다.
“극한직업이라는 TV프로그램에 단무지 공장이 나왔었는데 공장에서 단무지를 만드는 노동자들이 모두 서서 세척하고 있었다.
엉덩이를 어딘가에 걸치고 좀 편하게 일하면 안 될까? 왜 아무도 그런 생각을 못한 걸까?
… 산업부에서 제조혁신산업에 대해 삼성이나 현대 고참 엔지니어들이 협력업체 현장을 보면서 공장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개선해주는 사업을 한다.
성과가 있다. 그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몰랐겠는가? 그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고치면 생산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을까?
한 번이라도 했을 수 있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안 했을까? 굳이 그런 것을 이야기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 거다.”
최영섭 선임연구위원이 소개한 사례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노동자 교육훈련 내용 자체의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일터에서 배운 여러 가지 것들을 노동자들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고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 알고 있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이 배움이 타율적인 교육훈련이라는 점이다.
노동시장에서 생존해야 한다는 이유가 크기 때문에 내적 동기로 인한 배움보다는 해야만 했던 배움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내가 이 일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상태인데 굳이 무언가 작업장 혁신에 대해 좀 더 배우고 고민하며 현장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필요성도 못 느끼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의 내적 동기에서 나온 교육훈련이 가능하지 않다면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노동시장에서 생존의 범위를 넘는 자발적 동기를 갖지 못한 교육훈련 태도를 보인 노동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일까?
인터뷰 중 많은 사람들은 그 책임이 노동자를 둘러싼 환경에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제도적 환경이 개선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자발성을 고취하는 교육훈련은 힘들다고 한다.
인간이 일터에서 소외받지 않기 위한 교육훈련이 가능하려면?
인간이 일터에서 소외받지 않기 위한 교육훈련이 가능하려면 몇 가지 조건들이 충족돼야 한다.
① 시민적 권리로서 교육훈련
“우리는 노동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지불노동과 부불노동. 지불노동은 노동시장에 참가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보수를 받는 노동이다.
부불노동은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하는 노동이다. 가사, 양육, 돌봄과 같은 것이다. 교육도 거기에 들어간다. 우리는 부불노동에 지원을 해줘야 한다.
지금 지불노동에 인력을 투입하기 위한 재생산을 부불노동에서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부불노동에서 인력 재생산을 넘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삶, 개인의 삶을 뒷받침한다. 이 부불노동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 보호론이다.
가사, 양육, 돌봄, 교육훈련에 지원을 하고 재정을 투입하고 당연히 그럴 권리를 개인이 갖는 것을 많은 전문가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을 사회적 시민권이라고 보통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시민권에는 정치에 대한 권리, 자유에 대한 권리, 사회적 권리가 있는데 사회적 권리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가 매일 일-생활 균형을 말한다. 이것은 지불노동과 부불노동의 비용을 맞추자는 이야기이다.
교육훈련은 지불노동에서 많은 사용자들이 요구하는 숙련을 갖춰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불노동을 보호하려고 시민적 권리로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시민적 권리로서 교육훈련의 기본 논의이다.”
김안국 직능원 선임연구위원
김안국 직능원 선임연구원은 「시민권 기반 직업능력개발체제 구축」이라는 보고서에서 지금의 직업능력개발사업이 고용보험 중심인 것을 비판하면서
노동자 교육훈련의 시민권적 성격을 강조했다.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들(영세, 비정규직 등의 노동형태)과 앞으로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늘어날 특수형태노동자(플랫폼노동자)들까지 역량개발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취약계층에 놓인 노동자들을 고려한 정책이다. 또
한 시민의 권리로서 노동자 교육훈련이 사회에 자리한다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고 자발적으로 교육훈련을 요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② 노동조건의 개선 : 장시간노동 근절, 원-하청 관계 문제 해결, 비인격적 관리
취재로 만났던 개인, 노동조합 간부, 노동조합 조합원, 전문가들은 모두 교육훈련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갖춰지길 원했다. 특
히나 노동시간에 대한 부분을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장시간 노동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일터에서 무엇인가를 또 한다는 것은 부담이라는 것이다.
교육훈련을 받고 싶어도 흔히 말해 일에 치이거나 장시간 노동으로 휴식 시간도 부족하다면 교육훈련으로 자기역량개발의 자발성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원-하청 관계에서 비롯한 문제도 직능원 연구위원들이 공통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항으로 꼽았다.
모든 대기업들이 그런 행태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원청인 대기업이 하청 관계인 협력중소기업의 노동을 착취하는 수직적 관행을 타파해야 한다는 말이다.
직능원 연구위원들은 단적으로 하청이 원청의 물량을 맞추기도 힘든 상황에서 그곳의 노동자들이 교육훈련 받을 여력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교육담당자들도 노동자들에게 교육훈련을 받으라고 강조하지도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김현규 노사발전재단 혁신컨설팅팀 팀장도 중소기업 교육훈련을 컨설팅하면서 중소기업 내부에서 노사가 모두 교육훈련의 욕구가 있더라도 원청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중소기업에게는 교육훈련 자체가 부담이라고 설명했다.
최영섭 선임연구위원은 비인격적 관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우리 사회 인사관리에서 인격적 관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인적자원 관리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인격적 관리와 비인격적 관리이다.
인격적 관리는 관리하는 사람의 주관적 평가에 초점을 둔 관리기법이다. 물론 이것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회사와 마음 맞는 사람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부작용이 크다. 워낙 관리자들이 인격적 관리를 통해 맘에 드는 사람에게만 투자하고 차별하는 경향이 크고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도 많다.
비인격적 관리는 구체화된 평가와 보상 체계로 시스템적인 인사관리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노동자의 예측성이 올라간다.
이것을 했을 때 이러한 평가와 보상이 이뤄진다는 예측 말이다. 그랬을 때 정당한 보상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교육훈련에도 자발적 동기를 부여한다.”
③ 노동자 참여 제도
교육훈련의 내용, 시스템 등을 결정할 때 노동자가 기획과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은 노동자 교육훈련에서 노동자의 자발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조건이다.
노동자가 최고 수준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은 노사 혹은 노사정 틀에서 자기 주도성을 발휘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주도성을 가지고 결정하기 위해서는 해당 안건에 자기의 이해와 욕구를 반영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그렇기에 노동자 참여 제도가 활성화된다면 노동자 교육훈련의 자발성 또한 올라갈 것이다.
김현규 노사발전재단 혁신컨설팅팀 팀장은 자신의 팀이 기업을 컨설팅하는 방식에서 예를 들었다.
김현규 팀장은 “컨설팅의 조건은 노사가 공동으로 결정한 사항에 대해 컨설팅을 해준다는 것인데 이는 노사가 대립된 상황이거나 한 쪽에 종속된 상황,
어느 한 쪽이 배제된 상황에서 컨설팅 내용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이는 기업 안에서 주체인 노동자도 기업의 경영과 혁신 방향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노동이 존재하는 혁신 그리고 사회적 대화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 하더라도 노동자가 일터에서 자발성을 가지고 교육훈련 욕구를 가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 많은 사회적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기술 혁신으로 발생하는 이윤의 적절한 분배, 단순반복적 업무가 사라질 경우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 혹은 장기적 실업 상태에서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 안정망과 그 이후의 좋은 일자리 등등의 문제도 생각해봐야 한다.
시민적 권리 기반 교육훈련체계를 실행하기 위한 재원 문제도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조건이 많다는 것은 어찌 보면 풀어야 할 문제가 많고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말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노동을 배제한 일터에서는 노동자의 자발성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노동자 교육훈련이 인간 소외를 고민하지 못했다는 점도 확실하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4차 산업혁명 시기에 기술 혁신을 해야 한다는 구호는 노동자에게 강요로만 작용할 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평가할 수 없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4차 산업혁명을 명확히 규정하고 우리 사회에 적합한 방식으로 재탄생시키려는 시도는 없었다.
물론 다가올 4차 산업혁명이라는 명제에 대해 여러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긴 했지만 세상이 급격히 변할 것이니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정도다.
정부도 기술 혁신을 강조하고 기술 혁신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수준이다. 아직 4차 산업혁명 시기의 출발선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할 공동체의 당사자인 노동자, 사용자, 정부는 같은 위치에서 노동자 교육훈련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 논의를 해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대화를 통해 4차 산업혁명이 몰고 올 노동자 교육훈련의 기준을 세우지 않는다면 이전의 생존 중심 교육훈련이 낳았던 일터에서 인간 소외가 반복될 것이다.
인간이 소외된 공동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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