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성평가 절차를 간소화하고 평가 과정에서 근로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내용을 담은 개정 사업장 위험성평가에 관한 지침(고시)이 22일 시행된다. 노사가 자율적으로 직접 사업장 안 유해·위험 요인을 인지, 대책을 수립해 재해를 줄여나가자는 취지다. 2014년 시행됐지만 형해화했다는 지적을 받는 위험성평가 실효성이 높아질지 주목된다.
위험성 추정 절차 생략, 매년 정기평가 없애
노동부는 지난해 11월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했다. 2026년까지 사망사고만인율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줄이기 위한 ‘자기규율 예방체계’ 구축하겠다는 것이 뼈대다. 위험성평가 지침 개정은 그 출발점이다.
개정 지침은 사업장의 위험성평가 부담을 낮추는 데 초점을 맞췄다. 위험성평가 과정 중 위험성 추정의 절차를 없앴다. 위험성의 빈도와 강도를 곱하거나 더해 위험 정도를 계량화하는 위험성 추정 과정이 어렵고 복잡해 현장의 위험성평가 문턱을 높인다는 판단에서다.
1년에 한 번 시행해야 하는 정기평가는 앞서 실시한 위험성평가 결과의 적정성을 재검토하는 것도 인정하기로 했다. 사업장 설립 후 최초 위험성평가 후 1년마다 전체 유해·위험요인 정기평가를 실시하는 부담을 덜어낸 것이다.
개정 고시에 따르면 정기(1년 단위)·수시(설비·물질 신규 도입 또는 산재 발생기)평가는 상시평가로 갈음할 수도 있다. 상시평가는 매일 작업 전 안전점검회의(TBM·tool box meeting), 주 단위 원·하청 합동점검회의를 통한 위험성 이행확인 및 점검, 월 단위 노사합동 순회 점검, 아차사고 분석, 제안제도 실시 등 평가로 진행된다.
위험성평가 전 과정 노동자 참여 명시
사업장 규모별 단계적 의무화 추진
위험성평가 전 과정에 노동자 참여를 보장하도록 한 것도 주목된다. 개정 전 고시의 경우 위험성평가 과정 중 유해·위험요인 파악, 위험성 감소 대책 수립·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경우에만 노동자가 참여하도록 했다.
위험성평가 결과 전반을 노동자에게 공유하는 규정도 신설됐다. 과거에는 위험성평가 잔류 위험이 있는 경우에만 노동자에게 알리면 돼 어떤 위험성이 존재했는지 노동자는 알기 어려웠다.
사업장 규모에 따라 위험성평가 실시 단계적 의무화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위험성평가를 시행하지 않는 사업장에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위험성평가는 안전보건관리 책임자의 업무로, 업무 미이행에 대한 과태료 부과는 가능하다. 하지만 위험성평가 자체를 실시하지 않은 것에 따른 제재 조항은 없다.
류경희 노동부 산업안전보건본부장은 “현재 TF에서 논의 중이고, 올해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해 하반기라도 300명 이상은 의무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처벌 위주 행정은 위험 감추게 해”
자기규율 예방체계에 기대감
다수의 전문가들은 자기규율 예방체계 구축 효과를 기대하는 입장인데, 현장의 우려는 계속된다. 사업주 부담 경감을 위한 규제완화나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면죄부라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손익찬 변호사(법률사무소 일과사람)는 “중대재해처벌법으로 기소된 14개 사업장의 공소장을 보면 한 군데를 제외한 나머지 사업장은 위험성평가를 하지 않았다”며 “위험성평가를 한 사업장도 사업장 현실과는 맞지 않는 내용으로 실시해 위험성평가를 한 것이 아니다고 판단해 사무위반으로 기소가 됐다. 어떤 내용이든 위험성평가를 실제로 해 볼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류현철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일환경건강센터 센터장)는 “위험성평가 자체를 사업장에 확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위험성 추정과 같은) 형식적인 방법이 어떤 게 맞느냐(는 논쟁)보다 현장의 위험을 드러내고 인지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란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업장이 위험성평가를 하면 노동부가 ‘이건 위험이 과소평가된 것이다, 혹은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평가하며 (사회적) 합의를 찾아가는 과정인 건데, 똑바로 안 하면 처벌 하겠다고 하면 (사업주는) 위험을 감추게 된다”고 덧붙였다. 산재를 예방하려면 산재 발생 뒤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얘기다.
강태선 서울사이버대 교수(안전관리학)는 “(현장에는 위험성평가와 관련해) 형식주의가 만연해 있어 고시를 더욱 쉽게 변경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본다”며 “다만 위험성평가의 목적·목표에 맞춰 노동부의 감독이 표준화돼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꼬집었다. 일관된 기준으로 현장의 위험성평가 감독이 이뤄져야 효과를 낼 수 있단 의미다.
“사업장 환경 보면 자율성 보장하기엔 일러”
좋은 취지에도 현장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변수지·박정준 공인노무사(노무사사무소 약속)는 “현장에서는 위험성평가 수치가 높게 나오면 개선조치를 해야 하는데 개선조치를 하지 않기 위해 (위험성) 점수를 낮게 주는 일이 생기고 있다”며 “작업자 판단과 시선이 위험성평가에 반영하도록 한다는 게 정부의 자기규율 안전보장의 내용인데, 자율성을 보장하기에 아직 사업장 상황이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를 향한 노동자 불신은 깊다. 윤덕기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은 “노동자 참여 권리는 2020년부터 법제화됐지만, 사업장에서 각종 이유로 노동자 참여를 시키지 않았다”며 “직반장이 위험성평가에 참여하는 경우 찍힐 것을 우려해 소극적으로 평가하고, 위험성 점수가 낮게 측정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윤 국장은 “중대재해처벌법 처벌을 피하기 위한 방도로 위험성평가를 꺼낸 것”이라며 “정말 위험성평가를 통해 재해를 줄이려면 재해가 많이 발생하는 영세 소규모 사업장부터 강제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개정 고시에 따르면 위험성평가 전 과정에 노동자 참여를 밝히고 있지만, 어떤 노동자가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없다. 노동자의 목소리가 사업주에 좌우되지 않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실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