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재해로 인정되지 않는 ‘범죄행위’를 증명할 책임은 근로복지공단에 있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에서 정한 범죄행위는 유족급여 지급의 예외 사유에 해당하므로 공단이 이를 증명할 책임이 있다는 취지다.
공단 “범죄행위로 사망” 급여·장의비 지급 불승인
6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트레일러 운전기사 A(사망 당시 56세)씨의 아내가 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심리불속행 기각하고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최근 확정했다. 심리불속행 기각은 원심에 중대한 법령 위반 등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본안 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다.
A씨는 2018년 7월 부산 신항만 부근에서 트레일러를 몰다가 중앙선을 침범해 반대편에서 오던 차량 2대와 충돌했다. 이 사고로 A씨는 화상과 다리 절단 등 중상을 입어 급히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3시간여 만에 숨지고 말았다.
A씨 배우자는 업무상 사고에 따른 사망이라며 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중앙선 침범 사고는 산재보험법에서 정한 범죄행위라는 이유에서다. 산재보험법(37조2항)에 따르면 노동자의 범죄행위나 고의·자해행위가 원인이 돼 발생한 사망은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는다.
“공단, 중과실 증명책임 다하지 않아”
쟁점은 범죄행위 증명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였다. 국내법은 항고소송(행정청의 처분을 취소·변경)의 경우 원고(재해자)가 권한을 행사하는 규정의 요건을 증명하도록 하고 있다. 반대로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규정의 요건은 피고(공단)가 증명해야 한다.
1심인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재판장 장낙원 부장판사)는 이를 토대로 공단이 ‘범죄행위’를 증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A씨 아내에게 유족급여를 지급하는 권한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처분이므로, 공단이 ‘지급 예외 사유(범죄행위)’를 증명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망인의 사망이 ‘범죄행위’로 인해 발생했다는 점은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의 예외 사유에 해당하므로 공단이 이를 증명해야 할 것”이라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유족이 망인의 무과실을 뒷받침하는 사정을 밝혀 내지 못했다고 해서 반대로 공단이 고의 또는 중과실에 대한 증명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A씨의 중앙선 침범이 교통사고처리 특례법(교통사고처리법)상 중과실에 해당한다는 공단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중앙선 침범으로 인해 교통사고를 일으켰더라도 반드시 중과실치상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며 “운전자가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았다면 교통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곧바로 중과실이 있다고 추정할 법률상 근거는 없다”고 지적했다.
“증명 못한 범죄 행위, 산재불인정 이유 안 돼”
공단은 “오로지 A씨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라며 항소했지만,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재판부는 “차량의 누적 주행거리가 59만킬로미터인 점 등을 볼 때 망인이 차를 통제할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며 “통제 가능했더라도 중앙선 침범시 크게 상해를 입거나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같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차량을 운전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원심 판단을 유지했다.
법조계는 범죄행위 증명책임을 명시적으로 판단한 최초의 판결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유족을 대리한 김용준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대법원은 범죄행위의 구체적인 판단 기준으로 ‘고의·중과실’과 ‘범죄행위가 사고의 단독 또는 주된 원인’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법원은 이를 모두 공단이 증명해야 하고, 증명하지 못하는 이상 범죄행위라는 이유로 불승인해서는 안 된다는 법리를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