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선작업을 하며 특고압 전자파에 노출돼 갑상선암이 발병한 전기노동자가 법원에서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았다. 배전전기원의 백혈병은 2018·2019년에 산재로 인정된 바 있지만, 갑상선암에 대한 법적 판단은 이번이 처음이다. 법원은 연구결과가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업무상 상당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전기노동자의 직업성암 인정이 확대될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극저주파 자기장’ 노출에 감전 위험 스트레스
2일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단독(손혜정 판사)은 지난달 20일 배전전기원 A(53)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소송이 제기된 지 1년6개월 만이다. 공단의 항소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A씨는 1995년부터 2020년까지 약 20년간 배전전기원으로 일하며 활선작업을 수행했다. 초반 3년간은 정전 상태에서 작업했지만, ‘무정전 작업’ 방식이 일반화되면서 1998년부터 전기가 흐르는 전신주에 올라 송·배전선로 유지·보수를 담당했다.
직접 충전부에서 작업하는 ‘직접활선공법’이 활용되면서 혼자 활선 작업차를 몰고 배전공사를 수행했다. 많게는 하루에 전봇대 20~30개의 기자재를 바꾸고 전봇대 7~8개의 전선을 교체했다. 전신주가 넘어지거나 여름철 전력수요 증가로 변압기가 고장이 나면 수시로 전봇대 점검에 투입됐다.
장기간 활선작업을 수행한 A씨는 2015년 11월께 ‘갑상선 유두암’진단을 받았다. 2만2천볼트의 특고압 전기가 흐르는 상태에서 초저주파 자기장 같은 전자파에 노출돼 암이 생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A씨는 평소 별다른 기저질환도 없었다.
A씨는 2020년 3월 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지만 불승인 결정을 받았다. 극저주파 자기장 노출과 갑상선암 발생과의 인과성을 뒷받침할 연구가 부족하고, 갑상선암과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진 유해인자의 직업적 노출은 없다는 이유였다. 또 전기공에서 갑상선암이 특이하게 높게 발병되지 않는다고 공단은 판단했다.
그러자 A씨는 지난해 1월 소송을 냈다. 그는 “약 18년간 활선공법을 활용해 전기가 통하는 상태의 전신주에서 ‘무정전 작업’을 수행하며 전자파에 노출됐다”며 “감전 사고 위험 속에 전기자재를 옮기는 고난도 작업을 하며 강박감과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주장했다.
“근로자에 증명책임 요구는 부당,
산재보험제도 목적 고려해야”
법원은 활선작업과 갑상선암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며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A씨가가 배전전기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지속해서 노출된 극저주파 자기장이 체질 등 다른 요인과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해 갑상선암을 발병하게 했거나 적어도 발병을 자연경과 이상으로 악화시킨 원인이 됐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연구결과’에 대한 판단이다. 공단은 자기장 노출과 갑상선암 발생과의 인과성 연구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는 없다”며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목적을 고려하더라도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사정에 관해 열악한 지위에 있는 근로자에게 증명책임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산재보험제도 도입 취지를 반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울러 십수년간 ‘직접활선작업’을 수행한 전기원이 매우 제한돼 연구결과가 적을 수밖에 없다고 봤다. 직접활선작업은 2017년부터 금지돼 배전전기원들은 현재 스틱으로 활선을 조정해 작업하는 ‘간접활선공법’을 활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재판부는 “고밀도의 전자기장에 노출되는 직업군의 건강 영향에 대한 과학적 결과를 도출할 만한 자료 자체가 없는 것을 두고 의학적·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해석해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판단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전기원 자기장 수치, 일반 회사원 26배
배전전기원이 극저주파 자기장에 노출된 수치가 높다는 점도 산재 판단의 핵심 근거가 됐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2017년 실시한 ‘활선작업자 건강상태 및 관련 실태조사’에 따르면 활선작업자의 극저주파 자기장의 평균 수치는 1.3μT(마이크로테슬라)로 측정됐다. 일반 회사원(0.05μT)의 26배에 달하고, 반도체 노동자(0.73μT)와 변전소 노동자(0.43μT)의 평균값보다 높았다. 특히 배전전기원의 자기장 최고치는 1천671μT로, 반도체(123μT)나 LCD공장(43.5μT)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기록됐다.
재판부는 “배전전기원의 평균 노출수준은 유럽환경 의학학술원이 2016년 발표한 노출권고하한(평균 0.1μT)의 13배에 달한다”며 “서울지역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A씨가 순간적으로 100~300μT 범위에 빈번하게 노출되고, ICRP(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와 ACGIH(미국산업위생가협회)가 공개한 최고값 1천μT를 초과하는 노출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고 설명했다.
A씨가 특고압 전류를 다루며 받은 스트레스와 질병 사이의 인과성도 인정됐다. 재판부는 “A씨는 약 18년 동안 하루 8시간 이상 고압의 전류가 흐르고 있는 활선을 다루며 작은 실수라도 하면 순식간에 치명적인 감전 사고를 입을 수 있다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왔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며 “업무상의 과도한 스트레스가 면역력에 악영향을 미침으로써 갑상선암 발병이나 진행을 촉진하는 원인의 하나로 작용했다”고 판시했다.
노동계·학계 “전향적 판결”
집단 산재신청 전망
노동계와 학계는 직업성 질환에 대한 ‘전향적 판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철갑 조선대 교수(직업환경의학과)는 “공단은 지금까지 의학적·자연과학적 연구결과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법원이 연구결과만으로 쉽사리 인과관계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산재보험제도의 목적을 명확히 밝힌 것”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삼성전자 LCD공장 노동자의 다발성 경화증과 관련한 2017년 8월 대법원 판결보다도 나아간 판결이라고 봤다. 당시 대법원은 “역학조사 방식 자체에 한계가 있었고, 사업주 등이 유해물질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점도 고려해야 한다”며 다발성 경화증을 산재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원심을 파기했다.
이 교수는 “삼성전자 사건에서 대법원은 희귀질환 연구결과가 충분치 않아도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데, 이번 사건에서는 구체적인 논거들을 나열해 보충했다”며 “공단은 갑상선암 뿐만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질환에 대해 요양급여 승인이 사회보험제도 목적에 부합한다는 점에 입각해 인용 결정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전전기원의 직업성 질병에도 이번 판결이 기준점이 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한전 하청업체 소속 배전노동자들은 지난해 2월 폐암·말트림프종·뇌척수암 등 직업성 질환을 인정하라며 집단 산재신청을 한 바 있다. 박세중 건설노조 노동안전국장은 “이번 판결로 유사한 소송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며 “피부암이나 근골격계 질환도 산재를 신청한 상태다. 집단 산재신청을 통해 배전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이 개선되는 계기가 되게끔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