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 유산해도 여성 개인 탓으로
업무상 질병 목록에 ‘유산’ 있지만, 산재 인정기준 ‘공백'
2020년 9월 경찰공무원 김가영(가명)씨는 임신 8주에 아이를 잃었다. 결혼 5년 만에 얻은 첫 아이였다. 그는 임신한 상태에서 상사의 고함과 욕설, 과도한 질책에 시달렸다. 직장내 괴롭힘은 임신 전인 2019년 중순부터 1년 넘게 지속됐다. 김씨의 학력을 조롱하고 동료들에게 험담을 일삼았다. 내부 감사에서 이러한 비위가 인정돼 가해 상사는 징계를 받았다.
김씨는 유산을 공무상 재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인사혁신처는 지난 2월 유산에 대한 김씨의 공무상 요양 신청을 승인했다. 직장내 괴롭힘으로 인한 유산이 ‘직업병’으로 인정된 것은 산재보험에서도 기록이 없어 김씨의 사례가 ‘최초’다. 김씨는 이제야 “희망이 생겼다”고 했다. 그는 “자책하던 시간이 길었다”며 “(유산이) 내 잘못이 아니란 사실을 인정받으니 몸도 마음도 추스를 힘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씨를 비롯한 많은 여성이 일을 하다가 유산과 사산, 조산을 경험하지만 산재로 인정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5년간(2017~2021년) 유산한 여성 노동자(국민건강보험 직장가입자)는 평균 4만5천710명이다. 직장 여성의 유산 확률은 비직장 여성보다 높다.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와 피부양자 유산 비율을 비교했을 때 직장가입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7년 55.8%에서 2021년 64.1%까지 높아졌다. 실제 가임기 여성 중 상대적으로 건강상태가 좋은 사람들이 주로 임금노동자로 고용되는 조건(건강노동자 효과)을 고려하면 직장인 여성의 실제 유산 위험은 비취업 여성보다 훨씬 높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유산이 산재로 승인되는 경우는 드물다. 최근 5년 동안 유산에 대한 산재 신청은 10건에 그친다. 이 가운데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된 사례는 단 5건에 불과하다. <매일노동뉴스>가 23일 남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서 입수한 건강보험공단공단의 ‘유산 관련 진료인 현황’과 근로복지공단의 ‘유산 관련 산재 신청 및 승인 현황’을 통해 확인한 수치다. 공무원의 공무상 재해의 경우 유산이 통계로 잡히지 않아 정확하지 않지만 인사혁신처 관계자는 “최근 10년간 승인 건수는 4건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5년간 유산 산재 신청 10건, 승인은 단 5건뿐
현행법상 유산은 업무상 질병에 해당한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시행령 34조는 업무상 질병의 인정 기준을 정하고 있는데, 질병 범위에 유산이 포함된다.
문제는 유산에 대한 구체적인 산재 인정 기준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산재보험법 시행령 34조 3항 별표3은 뇌혈관 또는 심장 질병, 근골격계 질병 등 12가지 업무상 질병에 대한 인정 기준을 자세히 적시했다. 하지만 유산은 기타에 해당하는 13호(즉 1~12호 질병에 해당하지 않아도 질병과 업무와 상당관계가 인정되는 경우)로 분류돼 구체적 산재 판정 기준이 없다. 공무상재해 인정기준도 다를 바 없다.
김씨는 이 때문에 신청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전례가 없다며 전문가들도 안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씨는 “의사들은 스트레스로 인한 유산같다고 하면서도 진단서를 써주지 않았다”며 “변호사들도 인정 사례가 없다며 수임을 주저했다. 사건에 집착하지 말라고 훈계하는 변호사도 있었다”고 말했다. 비용 부담에 부정적 반응까지 더해지면서 신청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김씨를 지원한 유연주 공인노무사(사람과산재)는 “(산재 인정에 대한) 가이드라인 자체가 없으니 어떻게 신청할지 난감했다. 유산을 일으킬 만한 요인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진행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의 경우 유산의 원인이 된 직장내 괴롭힘이 먼저 인정됐기 때문에 업무관련성을 비교적 수월하게 입증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기준 부재 속 오락가락 업무상 유산 판정
불명확한 기준으로 산재 판정은 일관되지 않았다. 고려대 산학협력단은 지난해 11월 ‘여성 근로자의 유산에 대한 산재 판단 등에 관한 연구’에서 2010~2021년까지 신청된 유산 산재보상 관련 인정(8건)·불인정(11건) 사례를 분석해 “같은 직종, 동일한 유해요인에 대해 인정·불인정 판정이 일관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는 고용노동부 연구용역으로 진행됐다.
야간·교대근무가 원인이 된 경우 불규칙·야근근무를 한 간호사의 자연유산은 인정됐지만, 밤 9시까지 근무한 간호조무사의 자연유산, 재해 3일 전부터 3일간 교대·야간근무를 한 간호조무사의 조산은 인정되지 않았다. 장시간 근무의 경우 시간외 근로를 한 학원강사의 조산은 인정됐다. 반면 주당 평균 60시간 근무한 주방장과 하루 10시간 병동근무한 간호사의 자연유산은 인정되지 않았다.
업무상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던 경우, 보호자의 폭언에 시달렸던 간호사의 자연유산, 학부모의 반복적 불만 제기에 노출된 학원강사의 조산은 인정됐다. 반면 환자와 마찰이 있었던 간호사와 직장상사의 불합리한 업무지시에 시달렸던 고객상담사의 자연유산은 인정되지 않았다.
업무 연관성에 대한 기준이 모호한 상황에서 의학적으로 유산의 원인을 밝혀내기 어렵다는 의견이 강조됐다. 연구진은 “산과학, 직업환경의학 등 의학적으로 원인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거나 자연유산의 경우 태아 염색체 이상 등이 임신 초기 흔하게 발생한다는 것이 불인정의 주된 판정 의견이었다”고 분석했다.
산부인과 전문의로 연구에 참여한 최승아 고려대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부교수는 “의학적으로도 유산이 언제, 어떻게 발생했는지 정확히 알기 힘들다”며 “의사가 병을 고치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유산의 환경적인 문제, 업무 연관성까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유산에 대한 의학적 규명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유산과 업무와의 인과관계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올해 9월 유산 산재 인정기준 나온다
유산 산재 인정기준의 부재 문제는 노동당국도 인식하고 있다. 노동부는 9월께 유산의 업무상질병 인정 기준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유산 산재의 구체적 인정 기준을 담은 산재보험법 시행령 별표3 개정안을 9월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유산 산재 인정기준을 연구한 연구진은 산재보험법 시행령 별표3 13호에 유산·사산·조산을 추가하는 개정안을 제안했다. 업무관련성 기준은 크게 ①화학물질 ②소음·방사선·진동·온도 변화·압력 등 ③생물화학적 원인 ④이 외 산모에 영향 미칠 유해인자 혹은 업무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해외연구와 유산 경험 노동자 10명에 대한 심층면접을 토대로 근로기준법 시행령 별표4 ‘임산부 등의 사용 금지 직종’과 산재보험법 시행령 별표3 ‘뇌혈관 질병 또는 심장 질병’ 등을 반영했다.
특히 다수 재해 신청자들이 호소했던 노동조건, 자세, 업무스트레스 등도 인정기준에 포함시킬 것을 제시했다. △신체를 심하게 펴거나 굽히는 업무 △신체를 지속적으로 쭈그리거나 앞으로 구부린채 하는 업무 △연속작업에서 5킬로그램 이상, 단속작업에서 10킬로그램 이상 중량물을 취급하는 업무 △업무 관련 돌발적이고 예측 곤란한 정도의 긴장·흥분·공포·놀람 △업무의 양·시간·강도·책임 및 업무 환경의 변화, 야간근무 등에 따른 육체적 또는 정신적 부담의 증가 △업무 관계에서의 폭력·폭언·기타 괴롭힘 행위 등이다.
여성노동자의 재생산권 보장하려면
논의가 산재 승인 여부에 국한돼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청 자체가 저조하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유산에 대한 인과관계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유산에 대한 책임은 대부분 여성 개인에 전가된다. 여성 스스로도 모성에 위험한 환경보다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 연구에 참여했던 이나래 한국노동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유산은 근골격계 질환과 성격이 다르다. 심층면접에서 만났던 10명 모두 유산도 산재일 수 있다고 인식하지 못했다”며 “여성노동자의 산재 신청률이 남성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것부터 문제의 시작”이라고 짚었다. 임신과 출산이 여성 개인의 문제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여성은 권리를 요구하거나 보장받은 경험이 없는 게 유산 산재 인정기준 공백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유산이 산재로 인정돼도 사실 실익은 크지 않다. 근로기준법상 유·사산 휴가를 5일 보장하고 있고, 자연유산의 경우 다른 업무상질병에 비해 치료기간이나 병원비에 대한 부담도 크지 않은 편이다.
김씨도 유산 2년 만인 지난해 9월에서야 공무상 재해 신청을 했다. 그 사이 여성질환, 뇌혈관계질환 등 유산 후유증으로 고생을 겪었다. 조승규 공인노무사(반올림)는 “정신적인 부분을 보상하지 않는 현 산재보험 체계에서 유산 산재는 쉽지 않은 문제”라며 “단순 치료기간뿐 아니라 일상을 회복하는 기간을 더 보장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 여성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김씨는 “임신한 사실을 알렸음에도 추가 근무를 하고 무거운 짐을 옮겨야 했다”며 “임신한 여성 노동자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면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아이와 일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아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