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중구 SK텔레콤 본사 전경.
대법원이 대기업의 계열사 간 전출은 불법파견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원심을 뒤집었다. 노동자를 모회사로 전출한 자회사는 근로자파견을 ‘업’으로 하는 파견사업주가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대법원이 사업주의 경영성 보호를 위주로 판단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대기업이 계열사에서 사실상 관행처럼 이어진 ‘전출’을 악용할 소지가 크다는 지적이다. 자회사가 모회사로 반복적으로 대규모 인원을 전출해도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적용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SK텔레콤, 계열사 직원 전출받아 ‘사업 활용’
17일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지난 14일 SK플래닛 직원 A씨 등 2명이 SK텔레콤을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 등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 중 일부를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약 2년8개월 만에 나온 대법원 결론이다.
이번 사건의 쟁점은 계열사 간 전출도 파견근로관계로 볼 수 있는지였다. 전출이 파견으로 인정된다면 파견법에 따라 2년을 초과해 일한 노동자를 직접고용할 의무가 사용사업주, 즉 모회사에 주어진다.
SK텔레콤은 2015년 뷰티중개서비스 이용이 가능한 신규 플랫폼 사업인 ‘티밸리’ 사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2년6개월에 걸쳐 계열사인 SK테크엑스와 SK플래닛으로부터 직원을 전출 받았다.
SK텔레콤은 SK플래닛과 전출 직원의 인건비를 6개월마다 정산해 지급하는 비용정산 계약을 체결하고 전출 직원에게 급여를 지급했다. SK플래닛 직원인 A씨 등은 2015년께 티밸리 조직으로 전출돼 업무를 수행했다. SK테크엑스가 설립되자 전출은 유지된 채 소속만 변경됐다.
이후 2017년 7월 티밸리 사업이 종료되자 이들은 원 직장으로 복귀했다. 이듬해 SK테크엑스가 SK플래닛에 흡수합병되면서 다시 소속이 바뀌었다. 그러자 A씨 등은 사실상 SK텔레콤에 파견돼 일했으므로 모회사인 SK텔레콤이 직접고용해야 한다며 2017년 8월 소송을 냈다.
2심 뒤집은 대법원 “전출은 원소속 복귀 예정”
1심은 계열사 간 전출은 파견이 아니라고 봤지만, 항소심은 불법파견에 해당한다며 A씨 등의 손을 들어줬다. 180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전출에다가 전출 기간조차 정하지 않은 채 2년여간 전출이 반복해서 이뤄졌던 점 등을 주요 근거로 봤다. 특히 SK텔레콤이 정규직보다 전출 직원에게 적은 임금을 지급해 이익을 취한 만큼 불법파견이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다시 뒤집었다. SK플래닛은 파견법(2조)에서 정한 ‘근로자파견을 업으로 하는 자(파견사업주)’로 볼 수 없다고 봤다. 대법원은 전출과 파견의 차이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준을 제시하며 이를 토대로 SK텔레콤 전출의 파견 여부를 판단했다.
먼저 직접고용의무는 파견사업주가 주체로서 근로자파견을 했을 때 적용된다고 봤다. 파견사업주는 반복·계속해 영업으로 근로자파견을 한 자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파견사업주 해당 여부는 △파견의 반복·계속성·영업성 유무 △원고용주의 사업 목적과 근로계약 체결 목적 △파견의 목적·규모·횟수·기간·태양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반면 ‘전출’은 원래 소속 기업으로 복귀가 예정돼 있으므로 파견과 구분된다고 봤다. 특히 ’계열사 간 전출‘에 대해 대법원은 “파견법상 근로자파견과 외형상 유사하더라도 제도의 취지와 법률적 근거가 구분된다”며 유사성만으로 파견사업주와 사용사업주를 나누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사업이 종료되면 원래 기업으로 복귀하기 때문에 기존 근로계약이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대법원 “근로자 전출 대가 없어”
이러한 기준을 토대로 대법원은 SK플래닛이 파견사업주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원고용주(SK플래닛)가 근로자파견으로 인한 대가나 수수료 또는 경제적 이익을 취득했는지는 근로자파견 행위의 영업성을 인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며 “SK플래닛 등은 SK텔레콤과의 비용정산 계약에 따라 임금 상당액 등을 받았을 뿐, 별도의 대가나 수수료는 취득하지 않았다”고 판시했다. 파견사업주로서의 ‘영업성’이 없다는 의미다.
아울러 SK테크엑스의 매출 대부분이 SK텔레콤에 의존했다는 부분은 파견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봤다. 대법원은 “SK테크엑스의 지분을 100% 보유한 특수한 관계에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매출을 근로자 전출의 대가로 평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SK텔레콤이 전출 직원을 직접고용하는 것에 비해 초과근로수당 등을 적게 지급하는 이익을 얻었다는 이유로 영업성을 인정한 원심 판단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SK플래닛의 사업 목적이 파견과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전출 직원들은 SK텔레콤과 ‘동일한 기업집단’ 소속이라고 전제했다. 대법원은 “전출 직원들이 사업 종료 후 SK플래닛으로 복귀해 근무한 점을 보면 A씨 등에 대한 근로계약 체결의 목적은 근로자파견을 위한 것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티밸리 사업 특성상 전문성을 갖춘 계열사 직원의 전출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또 A씨 등이 근로자파견의 상용화·장기화나 고용불안 등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직접고용 없이 자회사 충원’ 현실화하나
이번 사건은 계열사 간 전출의 ‘리딩 케이스’로 평가된 만큼 대법원 판결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전출은 파견이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대기업이 계열사 인력을 편법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지적이 인다.
권두섭 변호사(직장갑질119 대표)는 “SK텔레콤은 자회사를 통해 전출방식으로 인력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며 “자회사가 반드시 인력공급사업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본래 다른 사업이 있더라도 얼마든지 근로자파견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이 대기업 모회사가 노동법 적용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줬다는 우려도 나타냈다. 권 변호사는 “앞으로 대기업이 직원을 직접고용하지 않고 자회사를 통해 충원하는 꼼수로 활용될 소지도 있다”며 “대법원은 사회경제적 영향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사안을 판단해야 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