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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수행을 위해 운전하던 중 재해자의 중과실로 교통사고가 발생해 사망했더라도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에서 정한 ‘범죄행위’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업무수행 중 교통사고와 관련해 업무상 재해의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 하청노동자, 중앙선 침범 사망
‘범죄행위 해당’ 쟁점, 2심 산재 불인정
30일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지난 26일 출장 중 교통사고로 숨진 노동자 A씨의 아내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삼성디스플레이 하청업체에서 일한 A씨는 2019년 12월 업무용 차량을 이용해 교육에 참석했다가 근무지로 복귀하던 중 중앙선을 침범해 마주 오던 트럭과 정면충돌했다. 이 사고로 차량에 화재가 발생해 A씨는 목숨을 잃었다.
A씨 아내는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지만 거부됐다. 교통사고처리 특례법(교통사고처리법)상 범죄행위로 사고가 났다는 이유에서다. 수사기관은 졸음운전을 사고 발생 원인으로 추정했다. 검찰은 A씨가 사망했다는 이유로 불기소 결정(공소권 없음)했다. 유족은 공단 판정에 불복해 2020년 8월 소송을 냈다.
쟁점은 A씨의 사고가 산재보험법의 ‘범죄행위’에 해당하는지였다. 법률 37조2항은 “근로자의 고의·자해행위나 범죄행위가 원인이 돼 발생한 부상 또는 사망은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는다”고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사업주가 제공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등 지배·관리하에서 발생한 사고는 ‘출퇴근 재해’로 규정했다.
1심은 A씨의 사망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타인의 관여나 과실 없이 오로지 근로자가 형사책임을 부담해야 하는 법 위반행위를 했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범죄행위’에 해당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항소심은 유족의 청구를 기각했다. 중앙선 침범행위는 도로교통법상 범죄행위에 해당한다고 봤다. 교통사고처리법이 정한 12개 중과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고인이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았더라면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운전자의 주의의무를 게을리한 중대한 과실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통상 수반되는 위험 범위”
법조계 “일률적 공단 판단에 제동”
대법원은 다시 항소심을 뒤집었다. 통상적으로 수반되는 ‘위험의 범위’ 내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중앙선 침범으로 사고가 났더라도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대법원은 “사고의 경위와 양상, 운전 능력 같은 사고 발생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 근거로 △출장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사고가 발생한 점 △중앙선 침범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점 △음주운전이 아닌 졸음운전으로 추정된 점 △운전면허 취득 후 교통사고 이력이 없는 점 등을 들었다. 재판부는 “A씨 사고는 업무수행을 위한 운전 과정에서 통상 수반되는 위험의 범위 내에 있는 것으로 볼 여지가 크다”며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고 주문했다.
하급심에서는 업무수행 중 운전자 과실로 발생한 교통사고와 관련해 판결이 엇갈리고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11월 산재 사고로 눈 수술을 받은 후 출장을 다녀오던 중 중앙선을 침범한 사건에 대해 업무상 재해라고 판결했다. 이 밖에 무면허로 전동퀵보드를 타고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로 숨진 경우도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반면 지난 5월 신호를 위반해 사망한 노동자 소송에서는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법조계는 이번 판결로 교통사고가 재해자의 중과실에 해당하더라도 공단의 획일적인 판단은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2019년 ‘법령위반으로 발생한 사고의 업무상 재해 인정기준(지침)’을 신설해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산재보험법에서 규정하지 않은 중과실 행위로 인해 발생한 사고를 업무상 재해에서 배제해 논란이 일었다.
유족을 대리한 조운형 변호사(더드림법률사무소)는 “공단은 교통사고처리법상 의무위반사항이 있으면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범죄행위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며 “대법원이 일률적인 범죄행위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제동을 건 판결”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출퇴근 재해에 대해서도 이번 대법원 판결이 적용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