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대법원이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만을 기준으로 임금을 삭감한 ‘임금피크제’는 무효라고 판결한 뒤 노사정이 제각각 해석을 내놓고 있다. 정부와 재계는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만 해당할 뿐이고, 정년유지형일지라도 항상 무효인 것은 아니다”며 파장 최소화에 무게를 싣고 있다. 반면 노동계는 “개별적으로 소송에 들어간다면 사회적 갈등 비용만 커질 뿐”이라며 “노정 간 교섭으로 임금피크제 개선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법원 판결이 정년연장과 임금체계 개편 논의로 이어질지 관심이 쏠린다.

재계 “대법원 판결, 예외적이고 특수한 사례만 해당”

한국경총은 6일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는 원칙적으로 연령차별에 해당하지 않고,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 역시 기존 규정상 정년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된 임금피크제라면 대법원의 ‘무효’ 판결을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합리적 이유 없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는 이번 대법원 판결이 예외적이고 특수한 사례”라고 깎아내린 경총은 이런 내용이 담긴 ‘임금피크제 대법원 판결 관련 대응방향’을 회원사에 배포했다.

고용노동부도 지난 3일 배포한 ‘임금피크제의 연령차별 여부 판단에 대한 FAQ’ 자료에서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가 항상 무효인 것은 아니다”며 “개별 기업에서 시행하는 임금피크제 효력은 대법원에서 제시한 판단기준 충족 여부에 따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지난달 26일 전자부품연구원(현 한국전자기술연구원) 임금피크제 사건에서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의 타당성 △대상 노동자가 입는 불이익 정도 △대상 조치의 도입 여부 및 적정성 △목적에 부합한 감액 재원의 사용 등 네 가지 요건을 따졌다. 하나라도 요건에 미치지 못하면 무효가 된다.

이번 사건은 2013년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법) 개정 이전 임금피크제를 적용한 사례다. 대법원은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의 유효성 판단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 다음날인 27일 서울남부지법에서 한국전력거래소 임금피크제가 유효하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는 무효,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는 유효’라는 주장이 확산됐다.

정년연장하면 임금피크제 정당?

경총은 “2013년 법정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면서 임금체계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하기로 했는데 당시 정부와 국회에서 임금피크제도 여기에 포함한다는 점을 확인했다”며 “개정 고령자고용법이 시행된 2016년 이후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경우도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로 봐 유효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경총이 지난달 말 실시한 30대 기업 긴급 임금피크제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기업 25곳 중 23곳(92%)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이 중 73.9%는 정년 60세 의무화를 담은 고령자고용법 시행과 맞물린 2013~2016년 사이에 도입했다. 임금피크제 도입 기업 대부분이 ‘정년연장형’이라는 것이다.

노동부도 “대법원이 최근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확정한 ○○공단 사건과 하급심 판례에 따르면 고령자고용법 19조의2에 근거해 정년연장에 수반된 조치로 노사합의를 통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면 원칙적으로 연령차별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정년을 법으로 연장한 이후 시간이 도과함에 따라 임금피크제의 대상조치로 정년을 상향한 조항은 의미가 많이 퇴색했다”며 “정년연장보다는 임금삭감 효과만 남았다”고 비판했다. 남태섭 공공노련 정책기획실장은 “개별적인 법적 분쟁으로 간다면 사회적 비용과 갈등만 커질 뿐”이라며 “그동안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공공기관위원회에서 한 임금피크제 개선 논의를 바탕으로 노정교섭을 통해 임금피크제 개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당장 임금피크제를 손볼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정식 노동부 장관은 지난 3일 크라운제과를 방문한 자리에서 “대법원 임금피크제 무효 판결은 대부분 기업에서 60세 정년 의무화를 배경으로 도입한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와 본질적으로 다르다”며 “대법원에서 밝혔듯이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도 항상 위법한 것은 아니고 대법원이 제시한 판단기준을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며 재계와 입장을 같이했다. 임금피크제 개선 또는 폐지를 주장하는 노동계의 요구에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이 장관은 “고령인구 증가와 다양한 근무형태 확산 등에 대응해 장년과 청년, 노사가 상생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임금체계를 차근차근 준비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