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정부가 내놓는 각종 지침은 그저 권고일까 아니면 구속력이 있는 처분일까.

최근 이런 경계에 놓인 정부 지침의 성질을 다투는 행정소송이 제기됐다. 지난해 12월 공공노련(위원장 박해철)이 기획재정부를 상대로 경영평가편람 수정처분 취소를 청구한 행정소송이다. 최대 쟁점은 지침과 편람이 행정처분이냐는 것이다.

‘지침’으로 지시하고 ‘평가’로 때리는 기재부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한국노총 공공부문노조협의회 결성 배경이기도 한 공공기관 사내대출 규제다. 기재부가 지난해 7월29일 각 공공기관이 사내복지기금으로 재직자에게 생활안정자금과 주택자금을 융자해 주던 것에 제동을 건 것이 시작이다. 정부는 이때 이른바 공공기관의 혁신에 관한 지침(혁신지침)을 확정하고 이 내용을 반영해 같은해 10월1일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열고 2020년 12월 이미 확정했던 공공기관 경영평가편람을 고쳤다.

연맹은 이런 행정행위가 공공기관 노사의 단체협약 효력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공공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사내복지기금 운용과 이를 활용한 사내대출제도는 노사 간 자율적인 단체교섭에 따른 결과인데 기재부가 교섭조건을 강제하고, 어기면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교섭에 개입했다는 의미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두 가지 법적인 문제가 생긴다. 우선 헌법 위반 논란이다. 기본권은 법률에 의해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만 제한할 수 있는데 기재부 지침이나 경영평가편람 어느 쪽도 법률이 아니기 때문에 위헌이다.

국제협약에도 위반한다. 지난해 비준한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98호(단결권과 단체교섭권 협약)다. 이 협약은 공공부문 단협 효력을 제한하는 정부의 권력행사를 협약 위반으로 본다.

예산운용지침·경영평가편람, 대외적 구속력 갖췄나

위헌이나 ILO 협약 위반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선행돼야 할 게 있다. 혁신지침, 나아가 매년 공공기관의 예산과 인력, 임금인상 폭까지 결정하는 기재부의 준정부기관·공기업 예산운용지침과 경영평가편람이 행정처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정처분은 구체적 사실에 관한 법집행이다. 행정청 내부의 기준설정은 처분으로 보지 않는다. 인허가 같은 게 대표적 행정처분이다. 행정소송은 행정처분에 따른 권리·이익 침해를 구제하는 소송이라 지침과 편람을 행정처분으로 보지 않으면 소송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기재부는 지침과 편람은 대외적 구속력이 없는 내부 기준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기재부쪽 소송 대리인은 서면답변을 제출하면서 “공공기관 관리를 위한 행정기관 내부의 관리·감독 작용에 해당할 뿐 국민에 대해 권리를 설정하거나 의무를 명하는 공권력 작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행정처분이라는 전제하에 제기된 소송은 부적법한 소송”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이 판결에서 지침과 편람을 행정처분으로 보면 미치는 파장은 상당하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정부부처가 법률이나 시행령 개정 없이 가이드라인을 활용해 행정사무를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간 재판부는 행정처분 해석에 보수적이었다. 행정체계의 안정성을 고려한 조치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바뀌는 경향도 나타난다. 임재홍 방송통신대 교수(법학)는 “최근 들어 행정처분을 넓게 해석해 행정소송의 범위를 넓히는 방식으로 행정상 피해를 구제하려는 노력이 판례에도 드러나고 있는 경향”이라며 “기관장 해임 같은 규제가 가능한 대목 등에 비추어 행정처분으로 볼 여지가 상당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