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준식 최저임금위원장이 지난 29일 오후 내년에 적용할 최저임금 인상률 결정 배경을 기자들에게 설명한 뒤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최저임금위원회가 내년 최저임금을 올해보다 5.02%(460원) 인상한 9천620원으로 결정했다. 주 40시간 기준 월급은 201만580원이다. 가파르게 치솟는 물가상승률이 온전히 반영되지 않아 저임금 노동자 실질임금은 삭감되는 효과를 내게 됐다. 공익위원이 임의로 정한 기준에 짜 맞춰 최저임금을 결정하면서 사회적 대화기구라는 최저임금위 위상에도 생채기를 남기게 됐다.
‘속도전’ 이끈 공익위원
내년 최저임금은 30일로 넘어가기 직전 29일 밤 11시를 넘겨 결정됐다.
8년 만에 법정 기한을 지켰다는 수사가 뒤따랐는데, 배경에는 공익위원들의 ‘속도전’이 있었다. 지난 29일 밤 5.02% 인상안을 놓고 이뤄진 최저임금위 전원회의 표결에는 전체 위원 27명 중 공익위원 9명과 노동자위원 5명, 사용자위원 9명이 투표했다. 민주노총쪽 노동자위원 4명은 표결 전 퇴장했다. 사용자위원 9명도 기권 의사를 표시하고 표결 시작 직후 회의장을 떠났다. 표결 결과는 찬성 12표, 반대 1표, 기권 10표였다.
박준식 최저임금위원장은 법정 기한 내 결정하겠다는 뜻을 꾸준히 밝혔다. 최저임금 심의 과정에서 노동자위원은 최초요구안으로 올해보다 18.9% 인상한 1만890원을, 사용자위원은 동결안인 9천160원을 제시했다. 세 차례 조정 끝에 지난 29일 오후 노동자위원은 1만80원, 사용자위원은 9천330원을 수정안으로 냈다. 수정안을 받아든 공익위원은 “양측이 제출한 수정안은 논의를 촉진하기에 많이 부족하다”며 9천410원(2.73%)과 9천860원(7.64%)을 심의촉진 구간으로 제시했다. 노사가 구간 내에서 추가 수정안을 내지 않자 공익위원은 9천620원으로 단일안을 내고 표결을 요청했다.
공익위원안인 최저임금 인상률 5.02%는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 2.7%와 물가상승률 전망치 4.5%를 더하고 취업자 증가율 전망치 2.2%를 빼는 방식으로 정했다. 전망치는 기획재정부나 한국은행 같은 예측기관 평균을 사용했다. 이 수식은 어디에서 왔을까. 한국노동연구원이 매년 펴내는 임금전망 보고서에는 “생산성 증가에 상응하는 이론임금상승률은 실질경제성장률과 소비자물가상승률, 취업자증가율의 관계로 나타낼 수 있다”며 수식을 제시한다. 바로 ‘경제성장률+소비자물가상승률-취업자증가율’이다. 공익위원들은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이 산술식을 적용했다.
공익위원의 이런 최저임금 결정 방식은 사회적 대화기구인 최저임금위 무용론의 씨앗을 심는 것이나 다름없다. 공식에 대입하면 2024년 최저임금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법이 정한 최저임금 결정 기준인 생계비·유사노동자 임금·노동생산성·소득분배율 등을 반영하지 않은 점도 문제다. 표결 직후 박준식 위원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최저임금제도는 사회적 대화와 교섭의 성격을 상당히 강하게 가지고 있고, (최저임금위 논의는) 불만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일 수 있다”면서도 “저희가 제시한 산식이 최저임금 제도 취지를 제대로 반영하고 노동시장과 일자리, 노동자 복리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과연 미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많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급변하는 물가상승률을 반영하지 못한 점도 한계다. 공익위원은 기재부(4.7%), 한은(4.5%), 한국개발연구원(4.2%)이 제시한 소비자물가상승률 전망 평균치다. 한은은 최근 기존 전망치를 수정해 4.7% 이상을 제시했고, 추경호 기재부 장관조차 3분기 물가상승률이 6%를 기록하고 고물가가 상당 기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동자위원인 박희은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공익위원 단일안은 물가인상률에도 못 미치는 안으로서 사실상 실질임금을 삭감하는 효과를 불러올 것”이라며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로 인상률이 임금에 고스란히 반영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저임금 노동자 피해 규모는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호 한국노총 사무총장도 “엄청난 물가상승률로 불평등과 양극화가 더욱 심해질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낮은 (최저임금) 인상률은 저임금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내몰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정희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인상률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익위원이 억지를 썼다”고 지적했다.
공익위원 불 지핀 구분적용 논란
심의 과정에서 공익위원이 불을 지핀 최저임금 구분적용 연구용역 문제는 노사정 간 갈등의 불씨로 남게 됐다. 최종 표결을 앞두고 한국노총 노동자위원은 이 문제에 대한 공익위원의 입장 변화를 요구했다. 이동호 사무총장은 “공익위원이 정부에 권고한 업종별 구분적용 용역을 재검토해 줄 것을 위원장에게 요청했다”며 “박 위원장은 깊은 우려에 대해 공감하고, 정부의 수행과제가 악용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겠다고 답했다”고 설명했다.
공익위원들은 연구용역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박 위원장은 “사실에 입각한 의사결정이 중요한 요소가 돼야 하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대화를 촉진하기 위한 노력은 업종별 저임금 노동자 실태를 조사하는 것뿐 아니라 생계비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한 비중을 갖고 연구해야 한다”며 “데이터 용역의 연구 결과가 악용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공익위원들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말했다. 공익위원 간사인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경영학)는 “용역 의뢰한 것을 (최저임금) 구분적용을 위한 전 단계로 가정할 필요가 없다”며 “최저임금위가 결정할 수 있는 근거와 토대를 구축한다는 차원의 데이터와 자료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노총은 “업종별 차등적용을 강행할 경우 노사관계는 파국에 이르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는 입장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