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는 사람은 누구인가. 질문을 던지면, 고용주를 지목할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더, 그러면 당신의 고용주는 누구인가 질문하면 대답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자본가계급을 지칭할 것이고, 상인과 농민과 어민을 지칭할 것이며, 국민을 지칭하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초창기 자본주의 시대, 자본과 노동을 분석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따르면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이는 자본가다. 이론상 소자본가에 포함될 수 있는 상인과 농민과 어민까지는 그렇다 치고, 국민은 자본가계급이 아니다. 국민에는 모든 계급이 포함되고, 당연히 노동자도 포함된다.
자본주의 초창기까지 인간 역사에서 세금은 왕 또는 정부가 제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사적 소유의 개념이었다. 그래서 당시 공무원에게 누가 임금을 주는지 물었다면 왕 또는 총리 또는 대통령을 지목했을 것이다. 자본주의 초창기는 정부 수장이 자본가계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는다. 삼권분립이 작동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부는 국민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정부는 세금을 제멋대로 사용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쫓겨나고 감옥에 간다. 재벌 등 힘센 계급만을 위해 세금과 공권력을 사용할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선거에서 당선될 수 없다.
누가 임금을 지급하는가
하나의 계급으로 치환되지 않는 국민이 임금을 지급한다. 번듯한 노동자가 되지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상업에 나선 상인도 임금을 지급한다. 노동자보다 못한 처지에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는 농어민도 임금을 지급한다. 그렇다면 임금은 고용주가 지급하고, 고용주는 자본가계급 또는 소자산가라는 틀에 박힌 인식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 아닌가 싶다.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안정노동에 세금을 투입해서 평등수당을 지급하자는 주장이 있다. 청년수당은 정부와 지자체가 다양한 명칭과 방법으로 실현하고 있다. 사회안전망 또는 사회 복지 차원에서 제출된 정책 대안이다. 이것을 사회적 임금 개념으로 확장하면 어떨까 싶다.
한국 사회 10 대 90의 불평등은 미국을 넘어섰다. 총소득에서 절반이나 가져가는 상위 10%의 점유율을 그대로 둔 채, 하위 50%의 소득 점유율을 올릴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상위 10%의 소득을 강제로 끌어내릴 수 없다. 그랬다가는 차상위 9%에 속한 노동자들부터 들고일어날 것이다. 양대 노총이 앞장서서 소득인하 반대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사회는 대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질 것이다.
그럼에도 상위 10%의 소득을 줄여 하위 50%의 소득을 늘릴 수만 있다면 대혼란을 무릅쓸 수도 있을 텐데,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상위 10%의 소득을 줄여도 하위 50%의 소득은 저절로 늘어나지 않는다. 하위 50%의 대부분은 임금인상 투쟁을 해도 상위 10% 수준에 이를 수 없다. 기업 또는 가게에 지불능력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위 50%에 속한 노동자의 대다수는 노동조합을 하지 않고 임금투쟁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다 죽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위 50%를 형성하는 영세기업과 상업도 일자리를 유지하고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면서 국가 및 사회를 유지하는 매우 소중한 축이다. 하위 50%는 소비자로서 상위 10%의 기업 이윤과 소득에도 기여하고 있다. 그들의 소비에는 간접세도 포함돼 있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 및 상위 10%가 함께 책임을 나눠야 한다. 그들의 임금을 그들을 직접고용한 고용주에게만 떠넘기는 구조를 더는 방치하면 안 된다.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사회적 임금으로 개념이 확장돼야 한다. 국가와 사회가 세금과 기금 등으로 그들의 임금을 보충해야 한다.
지난해 7월부터 올해 2월까지 반년에 걸쳐서 정의당 사회연대전략회의가 진행됐다. 보고서가 곧 책자로 나온다. 보고서 분량은 많지 않지만, 기존의 진보와 노동운동 관점에서는 불편한 내용이 있다. 논란이 될 내용도 있다. 사회연대전략회의 보고서 제목은 일자리와 불평등 보고서다. 부제는 사회연대일자리와 연대사회의 기획 및 실행전략이다. 보고서는 불평등·임금·일자리에 대한 성찰이라는 문제제기와 문제의식으로 시작한다.
정의당 사회연대전략회의 보고서 1-2
임금은 일자리에서 노동력의 지출에 대해 제공되는 대가물이다. 그것은 노동능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금전적 가치로 지급돼야 한다. 적정한 주거공간 등 의식주 해결, 필수 불가결한 의료 등 사회서비스 향유, 필요한 자기계발 등 품격 있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임금이 지급돼야 한다.
임금은 노동력 투입으로 생산되는 상품의 가치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다. 이때 생산되는 가치는 상품을 생산하는 단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상품의 최종가치에 대한 분배는 각 공정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에게 일률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완성차 한 대의 가치가 각각의 생산공정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에게 똑같이 배분되지 않는 것이다. 같은 공정에서도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공정한가?)
임금을 지급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오랫동안 임금지급 책임을 고용인(employer)에게 한정해서 생각해 왔다. 고용인이 노동력의 사용자이자 노동력 투입으로 생산된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금을 둘러싼 투쟁은 고용인 개인을 향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노동력 투입으로 생산된 가치는 온전히 고용인 개인에게만 귀속되지 않는다. 정부는 세금으로 그 일부를 가져간다. 우리 사회는 생산된 가치를 활용해 그 이익을 공유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재생산하고 그 가치를 다시 사회화한다.
이처럼 임금은 각각의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의 사회적인 활동의 결과물이어야 하고, 그 임금의 지급은 고용인 개인만이 아니라 노동의 결과물을 공유하는 정부와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
고정된 화폐액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사람은 고용인이지만, 임금의 실질가치는 정부와 사회의 참견으로 정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를 들면 담뱃값이나 아파트 가격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정부와 사회의 참견으로 정해지는 담뱃값이나 아파트 가격은 임금의 실질가치를 낮추거나 높인다. 정부 재정으로 교육비를 지원하고, 사회보험을 통해 의료비를 보조하라는 것도 정부와 사회로 하여금 적정임금을 책임지도록 하려는 시도다.
노동력 유지와 재생산에 필요한 금전적 가치이자 상품의 부가가치에 따른 정당한 배분인 임금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최저 기준이며, 이 기준을 유지할 수 있는 임금지급 책임은 고용인뿐만 아니라 정부와 사회라는 점을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이해했을까? 사회적 임금의 지급을 정부와 사회를 향해, 그 사회 구성원인 나와 동료 시민들을 향해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실천으로 제기해 왔는가?
도전과 실험이 없지는 않았지만, 충분치 않았다. 아니 부족했다. 지난날 우리는 지급능력이 충분한 고용인 개인을 향한 투쟁에 집중했다. 지급능력이 있는 고용인을 상대로 한 투쟁은 성과도 있었지만, 지급능력이 부족한 고용인에게 임금을 받는 현장에서는 저임금이 당연시되는 의도치 않은 결과도 있었다. 나아가 이것이 개인의 능력에 대한 대가로 받아들이고, 능력 차이에 따른 공정한 결과로 인식됐다.
옥탑방과 수십억원 아파트의 차이는 한강변을 달리며 건강을 다지는 시간에 잠을 쫓으며 야간노동을 해야 하는 차이로 연결되고, 결혼과 출산의 여부로 이어졌다. 증여와 상속을 통해 탄탄대로에서 시작하는 삶과 학자금 대출로 빚쟁이로 시작하는 삶으로 세상은 완전히 분리됐다. 일자리에 따라 사는 집이 다르고, 교육받을 헌법적 권리를 차별받고, 의료서비스 접근권이 달라지며,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 24시간의 시간 활용조차 달라지는 불평등이 삶의 곳곳에 똬리를 틀었다. 견고해질 대로 견고해진 똬리지만, 임금의 사회적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고 일자리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을 고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의 도전과 실험은 주저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