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청사 전경.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할 때는 ‘반드시’ 노동자 과반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선언하면서도 ‘집단적 동의권 남용’이라는 새 법리를 제시해 향후 관련 사건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쏠린다. ‘남용’ 여부를 사용자가 증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판례 변경의 파장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새롭게 노동자의 동의권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법조계는 판례가 쌓여야 새 법리의 파급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대법원 “합리적 근거 없이 반대시 취업규칙 변경 유효”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과 관련해 지난 11일 내린 판결은 근로기준법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 1989년 근로기준법에 취업규칙의 집단적 동의 요건이 명문 규정(94조1항)으로 도입되기 이전(1979년)부터 이어졌던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를 폐기했기 때문이다. 근로조건의 ‘노사 대등’ 원칙을 재확인했다.<본지 2023년 5월12일자 4면 “대법원 34년 묵은 판례 바꿨다 ‘취업규칙 변경 반드시 동의’” 참조>
그런데 단서가 달렸다. 이른바 ‘집단적 동의권 남용’ 법리의 등장이다. 대법원은 “노조나 근로자들이 ‘집단적 동의권’을 남용했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의) 유효성을 인정할 여지가 있다”고 판시했다. ‘동의권 남용’ 기준으로 △취업규칙을 변경할 필요성이 객관적으로 명백한 점 △사용자의 진지한 설득과 노력이 있는 점 △노동자들이 합리적 근거나 이유 없이 취업규칙 변경에 반대하는 점을 제시했다.
그 근거로 ‘신의성실과 권리남용금지 원칙’을 들었다. 그러면서 동의권 남용 여부는 “법원이 직권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권리남용금지 원칙은 강행법규성을 가지므로 당사자 주장이 없더라도 법원이 직권으로 판단할 수 있다. 다만 근로기준법 94조1항 단서의 입법취지와 동의권 중요성을 고려해 ‘남용’ 여부는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관계자는 “근로자측이 집단적 동의권을 남용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불이익한 취업규칙 변경의 효력을 인정할 가능성을 열어 둠으로써 구체적 타당성을 기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대법관 6명 반대, ‘동의권 남용’ 법리 기준 모호
하지만 대법관 6명(조재연·안철상·이동원·노태악·천대엽·오석준)은 별개의견을 통해 ‘집단적 동의권 남용’ 법리에 의문을 표했다. 기준이 모호하다는 취지다. 이들은 “다수의견(7명)이 제시하는 판단기준은 어떠한 정도에 이르러야 하는지 불명확하다”며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에서 제시한 기준을 상당 부분 그대로 가져올 수밖에 없고, (기존) 법리를 폐기하고 집단적 동의권 남용 법리를 활용해야 할 이유와 필요성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동의권 남용에 해당한다면 사실상 노동자의 동의 의무를 인정하는 셈이라 법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이번 법리가 적용되면 향후 소송에서 사용자측이 노조가 동의권을 남용했다고 주장하고 이를 입증할 경우 법관이 직권으로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유효성을 인정할 가능성도 열려 있다. 이 때문에 법조계와 노동계는 예단은 이르다면서도 새로운 법리가 미칠 영향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집단적 동의권 남용’ 법리는 주로 과반 노조가 설립된 사업장에 적용될 여지가 크다. 근로자대표가 일부 직종의 취업규칙 변경에 동의하지 않을 때도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동의권 보장 불명확” vs “영향 제한적”
이번 사건에서 노동자들을 대리한 이환권 변호사(법무법인 이현)는 “이번 판결에서 새롭게 동의권을 제약하는 법리가 제시돼 실질적으로는 달라진 게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며 “사회통념상 합리성 폐기가 동의권 보장 결과로 나타날지는 확실치 않다. 개별 사건에서 새 법리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사례가 축적돼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용자측이 ‘남용’ 논리를 꺼내면 소송구조가 거의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최종연 변호사(법률사무소 일과사람)는 “사회통념상 합리성을 판단하는 기준에 비해 ‘집단적 동의권 남용’이 보다 인정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동의권 남용의 첫 번째 요건인 ‘객관적이고 명백한 변경 필요성’은 대단히 불명확한 기준이다. 파기환송심에서 동의권 남용을 두고 공방이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반면 ‘집단적 동의권 남용’ 법리 적용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박은정 인제대 교수(법학)는 “사회통념상 합리성과 집단적 동의권 남용 법리는 기본적으로 출발점이 다르다”며 “동의권 남용 여부는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금지 취지를 온전히 보장한다는 전제에서 엄격히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과반 노조의 동의권이 부정적 측면으로 작용하는 경우를 예상해 이를 제한하는 측면에서 법리를 제시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권오성 성신여대 교수(법학)도 “한번 만들어진 취업규칙이 근로자가 반대한다고 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변경될 수 없다는 것도 타당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며 “절차적 권리의 남용으로 접근하는 것은 종전 판례에 비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사용자가 증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결과에서도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사건에서 사측을 대리한 법무법인 지평은 보도자료를 내고 “집단적 동의권 남용 법리는 인정 사례가 매우 제한적일 것이라는 점에서 법리 변경에 따른 변화가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홍준표 기자 forthelabor@labor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