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라면서 시너 뿌렸다…4반세기 거리 떠도는 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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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담당자 댓글 0건 조회 110회 작성일 23-05-18본문
“동지”라면서 시너 뿌렸다…4반세기 거리 떠도는 민노총
민주노총은 4반세기(25년) 동안 대화로 풀어가는 방식과는 담을 쌓았다. 오로지 투쟁을 통한 쟁취를 고수하며 거리를 휘저었다. 대화라는 것이 본래 주고받는 것이다. 주기는 싫고 필요한 건 모두 갖겠다고 하면 대화가 될 리 없다. 민주노총의 투쟁 방식은 무조건 싸워서 원하는 것만 모조리 얻겠다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셈이다. 모 아니면 도다. 이런 기조가 중심축으로 작동하다 보니 내부 민주주의는 무시되기 일쑤다. 지도부가 사회적 대화에 나설 움직임이라도 보이면 내부 폭력도 불사한다.
이 바람에 경제 주체와의 협상은 한국노총의 몫이 됐다. 민주노총은 장외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한편으론 한국노총을 압박하는 모양새를 반복한다. 사회적 대타협이 이뤄지기라도 하면 정부와 경영계는 물론 한국노총까지 싸잡아 비판한다. 한국노총 일각에선 “민주노총이 책임은 우리에게 떠넘기고, 타협에 따른 과실만 챙긴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4반세기 대화 외면…“타격 줘야 회사가 구걸”
민주노총에서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이 대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이하 경사노위, 옛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려는 움직임이 지도부를 중심으로 일었다. 그때마다 그저 몸부림에 그칠 뿐이었다. 강성 조합원에게 밀려 번번이 좌절했다. 사회적 대화에 관한 한 지도부의 지도력이 무력화한 상태라는 평가를 받는다. 오히려 사회적 대화를 추진한 지도부는 쫓겨나듯 물러나기 일쑤였다.
민주노총의 내부 민주주의 수준이 어느 정도이기에 사회적 대화에 대한 논의가 백지상태로 4반세기를 흘러온 것일까. 과거 논의 과정을 되짚어 보면 민주노총의 내부 사정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행사장 시너 살포… 대형 참사 빚어질 뻔
광주지검이 기아자동차 노조의 채용 비리를 한창 수사하던 2005년 2월 1일이었다. 그즈음 전국의 민주노총 간부가 한자리에 모였다. 무대는 광주에서 300여㎞ 떨어진 서울 영등포 구민회관. 민주노총에 대한 지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대의원대회가 열렸다. 민주노총 내부에서도 자숙의 분위기가 일고 있을 때였다.
막상 행사가 시작되자 분위기는 영 딴판으로 흘렀다. 장내는 이내 아수라장이 됐다. 대의원석과 참관인석에서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아줌마는 조용히 해”라는 말이 나오더니 욕설이 난무하고, 멱살잡이가 벌어졌다. 단상이 점거되고, 순식간에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어디선가 소화기 분말이 분사됐다. 누군가 소방 호스로 물까지 뿌려대면서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철제 의자가 날아다니더니 급기야 인화성 물질인 시너가 뿌려졌다. 불씨라도 당겨지면 대형 참사가 날 수 있는 위기일발, 통제 불능의 상태로 치달았다. 결국 대의원들이 하나둘 참화를 피하듯 떠났다. 이 바람에 대의원대회는 의사정족수 미달로 유회됐다. 오후 3시에 시작된 대의원대회는 6시간40분 동안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폭력사태가 이어진 끝에 오후 9시40분 난장의 춤을 멈췄다.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는 어떻게든 폭력으로 무산된 논의를 이어가려 3월 15일 다시 대의원대회를 열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회의 시작 전부터 거친 몸싸움이 벌어졌다. 폭력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해 ‘질서유지대’를 배치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개회도 못 했다.
“사회적 대화가 무슨 말. 싸워서 쟁취” 주장
그들은 서로를 ‘동지’라고 부른다. 뜻을 같이하는 끈끈함을 자랑하는 용어다. 그런 그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서로를 원수 대하듯, 자칫하면 대형 참사를 감수하면서까지 격하게 충돌한 걸까.
이들이 이처럼 참담한 모습을 보인 이유는 다름 아닌 대의원대회에 상정된 안건 때문이었다. 바로 ‘사회적 대화’다. 정부·경영계와 노동시장에서 벌어지는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해법을 모색하자는 안건이 이처럼 격렬한 내부 폭력사태로 얼룩질 사안인지 국민으로선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민주노총에 흐르는 강성 기류는 자신들의 뜻대로 싸워서 쟁취하는 것을 노동운동의 본질로 여긴다. 전부 아니면 전무(無)다. 마음에 안 들면 들 때까지 계속 투쟁이다. 시너가 뿌려지던 날 나온 일부 강성 대의원의 발언은 이런 생각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발로 뛰며 투쟁을 조직해야 할 시기에 이 안건(사회적 대화)이 중요한 것이냐” “생산에 위협적 타격을 줄 때 사측이 교섭을 구걸한다”고 했다.
“민주깡총…배만 불렀나” 조합원의 질타
민주노총의 일선 조합원들은 항의와 질타를 쏟아냈다. 민주노총 홈페이지에는 “폭력노총, 부끄럽다”는 글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게시글의 제목부터 격했다.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노조가…’라는 점잖은 질타성 제목에서부터 ‘부끄러운 줄 알아라’ ‘민주깡총(깡패 노총)’ ‘민주는 빼야’ ‘니들도 정치인들과 똑같그마’ 등 채찍성 제목 일색이었다.
내용은 더 적나라했다. “집단 난투극. 국민들이 뭐라 하겠나? 기아차부터 터진 악재에다 또다시 난투극. 별 수 없는 집단이구먼” “민주노총에서 민주는 오늘 죽었다” “국민의 이름으로 경고하노니 이제 그만 할지어다” “민주노총이 정치판의 모리배만도 못한 폭력집단에 지나지 않다니… 충격이다. 그들은 민주노총이 아니라 폭력노총이다” “허! 허! 그냥 쓴웃음만 나오는구려” “민주깡총은 꼴통들의 집합체인가. 정신차려라. 귀족 노동조합? 키워주니까 겨우 이런 꼴밖에 보이지 못하나?” “상식이 통하는 세상 만들기가 이렇게 어렵습니까? 나는 조합 만들어서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꿔 왔습니다. 노동운동 고생한 것은 알겠는데 이제는 배만 불렀는가” “이제 국민에게는 민주노총의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절대 작은 외침에도 귀 기울이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Never… Never…” 조합원들의 분노와 실망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계획된 폭력…다시 발생해도 막을 방법 없어”
폭력 사태로 대의원대회가 무산된 뒤 당시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현 시기 민주노총의 총괄 입장 발표’라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나온 이 위원장의 발언은 민주노총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대변했다. 이 위원장은 “시너 등은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에 심각한 우려를 한다”고 말했다. 계획된 폭력, 계산된 무산 책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의원대회가 폭력적으로 침탈당한 것은 내용을 떠나 민주노총이 직면한 위기”라고 통탄했다. 지도부는 소수 강경파에 밀려 무력하고, 계파의 이해를 중재할 체계도 없고, 서로 다른 생각에 폭력과 제압으로 대하는 게 민주노총의 현주소라는 한탄이다. 그의 이어지는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향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막을 수단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폭력사태가 예견되거나 재현되더라도 막지 못한다는 그의 말은 유난히도 서글프게 들렸다.
일반 조합원의 질타에도 강성 간부들은 요지부동이다. 이후에도 ‘대화와 협상’을 거부하는 대의원대회는 반복됐다. 불과 4년5개월 전인 2018년 10월, 문재인 정부 시절이다. 이날 열린 대의원대회 주요 안건도 사회적 대화 참여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정족수가 미달해 무산됐다.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가 사회적 대화 참여를 대의원대회 안건으로 올린 것을 두고, 문 정부의 호의에 화답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문 정부는 민주노총에 공을 들이며 노사정위원회를 대체할 새로운 기구, 즉 경사노위를 만들겠다며 손을 내민 때였다. 그러나 이 안건을 논의하려던 대의원대회 무산에 이어 이듬해 1월 열린 대의원대회에선 경사노위 참여 안건이 최종 폐기됐다.
민주노총에서 완전히 꺼진 줄 알았던 사회적 대화의 불씨는 코로나19 사태가 닥치며 되살아나는 듯했다. 비록 경사노위 바깥에서 이뤄진 대화지만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가 성사됐다. 당시 한국노총은 “경사노위라는 법적 기구를 두고 민주노총만을 위한 별도의 사회적 대화체를 꾸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반발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한국노총이 참여하며 원포인트 대화체는 굴러갔다. 그리고 극적으로 노사정이 잠정 합의안을 도출했다. 민주노총이 1999년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한 뒤 22년 만의 사회적 합의였다. 국민은 노동운동의 변화를 기대하며 반겼다.
22년 만의 협약식, 15분 전 돌연 취소…머쓱해진 文 정부
그러나 민주노총의 내부 분위기는 딴판이었다. 18년 전으로 되돌아 흐르는 듯했다. 잠정 합의안을 두고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내부 반발이 거세게 표출되면서 전운이 감돌았다. 당시 김명환 위원장은 결단을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중앙집행위원회가 아닌 대의원들에게 이 문제를 묻기로 했다. 이에 정부도, 경영계도, 국민도 일말의 기대를 했다. 그러나 여지없이 무너졌다.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잠정 합의안은 속절없이 부결됐다. 사회적 대화로 일궈낸 산물은 또다시 ‘투쟁’ ‘쟁취’ 앞에 폐기됐다. 대의원대회에 앞서 당시 김 위원장은 “민주노총 위에 군림하는 정파 상층부가 아니라 대의원 동지들의 결정을 요청드린다”는 유튜브 연설을 했다. 대의원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호소하기도 했다.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김 위원장 집행부는 사퇴했다.
이 때문에 정부도 머쓱해졌다. 2020년 7월 1일 당시 정세균 국무총리와 두 노총 위원장, 경제단체 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무총리실 공관에서 진행하려던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 협약식’은 갑작스럽게 취소됐다. 민주노총 위원장이 행사 시작 15분 전에 불참을 통보했기 때문이다. 한국노총은 “민주노총이 고용 불안의 한가운데 놓여있는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소모의 시간으로 사회적 대화가 끝난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그렇게 또다시 노동현장의 외톨이 내지는 외곬으로 남았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역사는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환위기로 대한민국이 국가 부도라는 누란의 위기에 놓였던 때다. 그해 두 노총과 경영계, 정부는 노사정 합의에 이르렀다. 노사 협력이 국가적 위기를 타개할 관건이라는 국민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리해고와 파견 노동 법제화, 전교조 합법화, 건강보험 통합 등이 합의문에 담겼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대의원 67.6%가 반대하며 사회적 대타협의 결과물을 인정하지 않았다. 배석범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등 지도부가 총사퇴했다. 이어 1999년 2월 아예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했다. 이후 민주노총은 사회적 대화 기구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길거리 시위, 파업 등으로 점철된 장외 투쟁 방식이 4반세기에 걸쳐 일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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