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처리 기간이 길어 문제라는 이야기는 이미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산재가 승인되기까지는 근로자의 산재신청과 이에 대한 근로복지공단의 조사·심사 과정을 거친다. 산재처리 기간이 장기간이라 문제라는 주장은 주로 후자인 공단의 ‘심사’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법령상 산재처리 기간과 현실에서의 산재 처리기간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공단은 요양급여 신청을 받으면 7일 이내에 지급 여부를 결정해서 알려 줘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2020년 기준 근골격계질병 산재처리 기간은 이러한 기간을 훌쩍 넘는 평균 121일이었고, 직업성 암을 포함한 전체 업무상 질병 처리 기간은 평균 172.4일이었다. 이에 노동계는 지난해 5월부터 71일간 세종시 고용노동부 앞에서 ‘산재처리 지연 근본 대책수립·추정의 원칙 법제화·산재보험 제도개혁 촉구’ 농성투쟁을 한 바 있다.
한편 사실상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공단에 산재신청이 접수된 후의 기간뿐만 아니라, 공단에 산재를 신청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까지를 산재처리 기간으로 체감하게 되는데, 통계에는 잡히지 않지만 이러한 준비기간도 실제로는 만만치 않게 소요된다. 이는 산재 입증책임이 근로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업무상 사고의 경우에는 재해와 업무 간 인과관계에 대한 입증이 비교적 쉬워 재해자가 직접 공단에 산재를 신청하더라도 승인받을 확률이 높으나, 업무상 질병의 경우에는 입증이 어렵고 심사가 까다로워 신청을 대리할 전문가인 노무사를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어려운 점이 존재한다. 노무사는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과 관련된 법령이나 공단의 지침은 잘 알고 있을지언정 재해자의 업무 내용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해자의 업무가 특수한 용어를 사용하는 복잡한 공정에 해당한다면 이 어려움은 더욱 커진다. 결국 재해자가 자신의 업무 내용을 상세히 알려 줘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재해자는 노무사에게 산재신청을 맡긴 후에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많다는 점에서 당황하고, 여력이 없는 경우 안타깝게도 산재신청을 중도에 포기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업무와 재해 간 인과관계 입증을 위해서는 업무 수행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영상 등 자료도 필요하다. 그나마 사업장에 노동조합이 있다면 유해요인 조사시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자료 수집의 어려움이 덜하다. 또 기존에 자료를 보유하고 있지 않더라도 재해자와 같은 사업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료 조합원에게 사진이나 영상 촬영을 부탁하기도 용이하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에는 재해자가 스스로 자신의 업무 수행 모습을 촬영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고, 동료 근로자들에게 부탁하기도 쉽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러한 자료 수집의 어려움 때문에 산재신청을 포기하는 근로자들이 많다.
이러한 어려움은 사용자가 산재 입증에 필요한 많은 자료는 가지고 있음에도 재해자가 이를 받기 어렵기 때문에 발생한다. 산재보험법은 근로자가 산재신청을 위해 자료를 요구하면 협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이를 거부하는 경우에도 아무런 벌칙이나 과태료를 부과하지 않아 실효성이 없다. 재해자들이 회사에서 산재신청을 위한 업무 및 근태 관련 자료를 주지 않는다며 이를 얻을 방법이 없냐고 물어오면 위 조항을 안내하기는 하지만, 회사에서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착잡하기만 하다. 실제로 재해자가 위 조항을 들어 회사에 자료 제공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하다가, 사업장 앞에서 며칠 동안 1인 시위를 한 끝에 결국 자료를 얻어 낸 사례가 있었다. 지금의 제도하에서는 업무상 재해로 몸이 상한 근로자가 또다시 몸을 상해 가며 회사에 자료를 달라고 읍소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법원은 사용자가 협조를 거부하는 경우 이를 재해자에게 유리한 사정으로 고려하겠다고 하지만, 여전히 근로자에게 입증책임이 있는 한 근로자로서는 알아서 참작해 주겠거니 하고 마음 놓고 아무런 자료 없이 산재를 신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산재 입증책임이 근로자가 아니라 근로복지공단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있어 왔다. 그러나 지난해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로 업무상 재해의 입증책임이 근로자에게 있다는 기존 판례를 유지해 여전히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재해를 당한 근로자는 산재를 입증하기 위한 준비기간을 거쳐 공단에 신청을 하고 승인을 기다리기까지 오랜 시간을 어려움 속에서 보낼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단의 산재처리 기간을 줄이기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산재 입증책임을 전환하거나 최소한 상당히 완화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