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노동이사제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다. 5년간 지지부진했다가 11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공공기관운영법) 개정안이 통과하면서 가까스로 체면을 차렸다. 5년간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을 줄곧 주장한 노동계, 특히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한국노총 산하 금융·공공기관 산별노조·연맹은 한국노총 공공부문노조협의회(한공노협)를 구성하고 지난해부터 대정부투쟁을 하면서 제도 도입의 동력을 만들기도 했다.
한공노협은 이날 오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을 자축하면서 투명한 공공기관 운영과 질 좋은 공공서비스 제공을 강조했다. 이들은 “MB정권에서 독단적으로 진행된 해외자원개발은 처참히 실패했고 견실했던 공기업이 자본잠식에 빠졌다”며 “밀실에서 깜깜이로 진행돼 온 공공기관 운영의 부작용은 국민의 몫으로 전가됐다”고 지적했다.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를 통해 이런 실패를 만회하고 공공기관 투명성과 공익성을 담보하겠다는 다짐도 덧붙였다.
이번에 통과된 개정안에는 공공기관이 노동이사를 1명 두도록 하고 있다. 해석상 1명 이상을 둘 수 있지만 서울시의 노동이사제 조례처럼 규모에 따른 이사 정수를 정하고 있지 않아 초기에는 보편적으로 1명 정도를 임명할 전망이다.
이사회 구성원은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10명을 넘는 경우도 많아 사실상 노동이사가 다수 의견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보전달과 의사결정 참여 의의 정도를 찾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번 노동이사제 도입을 가장 낮은 단계의 노동자 경영참여로 보는 시각도 있다.
과제는 공공기관의 운영 거버넌스 자체를 독립시키는 쪽으로 모아진다. 한공노협은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현행 기획재정부 산하에서 국무총리실 산하로 이관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공공기관운영위 안에 보수를 논의하는 일종의 교섭기구를 만드는 것도 포함한다. 그간 공공노동자들이 정부 지침에 따라 임금인상이나 제도 변경이 이뤄져 임금·단체협상이 무력화했다. 노동계는 헌법에 보장된 교섭권을 침해받는 상황을 바로잡고 싶어 한다. 한공노협은 이런 요구를 ‘기재부 해체’ 구호에 담아 대선 노동정책으로 강화하고 있다.
한공노협쪽은 “공공부문 노동이사제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대정부투쟁 과정에서 제기한 요구안은 해결되지 않았다”며 “이런 내용들을 포함해 공공기관의 거버넌스를 뜯어고치고 기재부를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대선캠프와 접촉하며 대선의제화하는 대선투쟁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공노동자들이 지난해 8월18일 국회 앞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를 포함한 6대 요구사항 관철을 요구하며 거리에 나선 지 11일로 147일째다. 코로나19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로 대규모 집회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부세종청사를 매주 찾아 집회를 열고, 국회 앞에 천막도 차렸다. 이들은 이날 국회 본회의 직후 천막을 걷었다. 한국노총 공공부문노조협의회 대표자 3명에게 노동이사제 도입 과정 평가와 계획을 들었다.
- 노동이사제 도입 이후 과제는
류기섭 공공연맹 위원장
이번 노동이사제 법제화는 그동안 노동을 배제해 왔던 공공기관 내 경영상 의사결정 구조에 작은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나아가 공공기관이 정부정책을 이행할 때 그 정책을 직접 수행하는 노동자 의사를 확인하고 피드백을 남길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공공기관 운영과 공공정책 결정방식의 민주적 거버넌스 구축이 자연스레 공공부문의 주요 이슈로 떠오를 것이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 한국노총 공공부문노조협의회는 공공부문 정책 제안서를 통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요구를 명확히 했다. 공공기관운영위 이관, 경영평가 전면 개편, 공공기관보수위원회 신설 등 공공기관 운영 및 임금수준과 관련된 의사결정에서 정부, 특히 기획재정부의 일방적 결정방식 혁파와 지배구조 개선이 대선정책에 반영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 도입 과정에서 국회와 정부에 대한 평가는
박해철 공공노련 위원장
기재부는 낙제점을 면하기 어렵다. 기재부는 2020년 11월 사회적 합의 당시 분명 노동이사제 도입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다하기로 했으나 국회 설득이나 의원 입법안에 대한 입장 표명, 조율과 대안 제시 등 해야 할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당이 단독처리도 불사하겠다는 강경론으로 돌아선 이후 법안을 후퇴시키는 데 열중했다. 그간 독점해 온 경영권력을 사수하고, 노동자를 배제하려는 속내를 감추지도 않았다. 정부부처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기재부는 노동존중이라는 국정철학을 대놓고 무시하고 외면했다.
비록 국회가 대선국면에 몰려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도를 떠밀리듯 처리했지만, 이는 어떠한 신념이나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정치적 유불리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여당이 결단하지 못하고, 갖고 있는 힘을 발휘 못 한 답답함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야당을 설득하고 안건조정위 회부 등 법 통과를 위해 노력한 모습을 높게 평가한다. 아울러 시종일관 재계 입장을 대변하며 제도 도입에 반대해 오다 입법절차 내내 몽니를 부린 야당의 행태도 결코 잊을 수 없다.
- 노동이사제 확대를 위한 노력은
박홍배 금융노조 위원장
늦게라도 입법 된 것은 다행이지만 그 과정에서 얘기도 없었던 기타공공기관이 제외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동이사제 조항이 추가된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공공기관운영법)은 원래 모든 공공기관에 적용되는 법인데 조항별로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에만 적용되는 내용도 있다. 이를 테면 기재부는 법의 예산편성 조항을 근거로 예산편성지침을 만들어 놓고 기타공공기관까지 따르도록 사실상 강제하고 있다. 기타공공기관의 노동이사제도 그렇게 하면 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정관이나 단체협약에 명시해서라도 기타공공기관도 반드시 시행하도록 만들겠다. 노동이사제를 흠집 내고 확산을 막으려는 활동이 예상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서울시에서 시작해 거의 전국의 지자체 산하 공공기관으로 확산된 노동이사제가 제도 자체로 문제가 있었다면 이번 입법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제가 될 게 없다는 것이다. 기타공공기관에서 정착되고 이후 공공성이 강한 금융회사들로 확산한 후 종국에는 모든 민간 주식회사로 확대 적용될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