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넘게 일주일에 6일 동안 일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숨진 노동자가 근로복지공단의 판정을 뒤집고 법원에서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았다. 법원은 동료 직원이 퇴사해 업무시간이 증가한 상황에서 두통을 호소했는데도 계속 근무한 점 등을 근거로 산재에 해당한다고 봤다.
주 6일 10시간 근무에 잦은 야근
동료 퇴사에 분사 업무 도맡아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재판장 김국현 부장판사·2020구합52016)는 사망한 식료품제조회사 직원 A씨의 아내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고 14일 밝혔다. 공단이 항소하지 않아 1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다.
A씨는 1993년 식료품제조회사인 B사에 입사했다. 거래처 수금이나 식자재 세척·가공·포장 업무 등 회사 업무를 총괄하면서 토요일을 제외하고 주 6일 동안 하루 9시간 넘게 일했다. 매일 빠짐없이 아침 7시30분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했다.
그런데 B사 대표가 2011년 사업을 분리하면서 일이 늘기 시작했다. B사 대표는 자신의 아내 명의로 C사를 설립하고는 A씨에게 C사를 맡아 달라고 요구했다. A씨는 이를 수용했다. 하지만 함께 C사 업무를 담당하던 동료 직원이 2018년 10월 퇴사하면서 C사 업무를 도맡게 됐고, 출근시각도 오전 6시30분으로 한 시간 당겨졌다. 하루 평균 10시간 넘게 일하게 된 셈이다.
상황은 또다시 변했다. B사 대표는 2018년 10월 경영악화를 이유로 C사를 폐업했다. 또 B사가 미신고 폐수배출시설을 설치한 사실이 적발돼 지방자치단체로부터 형사 고소를 당했다. 이 과정에서 A씨는 C사 정리와 형사절차 처리 문제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A씨는 급기야 그해 10월께 극심한 두통을 호소했다. 2014년 고혈압을 진단받았지만, 꾸준히 약을 먹던 중이었다. 결국 A씨는 한 달 뒤인 11월1일 출근한 지 네 시간 만에 쓰러진 상태로 발견됐다. 즉시 병원에 이송됐지만 같은날 오후 뇌지주막하출혈로 숨졌다.
A씨 아내는 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요청했다. 공단은 “급격한 업무환경의 변화가 확인되지 않고, 과로나 과도한 업무상 스트레스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거부했다. 이에 유족은 2020년 1월 소송을 냈다.
법원 “업무상 부담 가중요인”
“과로·스트레스 명확해 감정 없이 인정”
법원은 과로와 스트레스로 A씨가 사망한 것이라며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고인은 동료의 퇴사로 업무시간이 증가했고, 대표자의 부탁에 따른 사업자등록 정리 및 형사절차 진행 등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뇌질환의 전조증상일 수 있는 심한 통증을 호소하면서도 즉시 진료를 받는 등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한 채 계속 근무했다”고 설명했다.
퇴사한 동료의 법정 진술도 뒷받침됐다. 동료는 “고인은 평소 먼저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며 “식자재가 퇴근시간 이후 입고되거나 식품 재고가 부족한 경우 야근했는데 퇴사할 때까지 야간작업이 월 3~5회씩 있었다”고 증언했다. 재판부는 “고인의 업무시간은 그 자체로 짧지 않고, (공단이) 실제 업무시간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A씨가 사망 직전 두통을 호소했는데도 휴식을 취하지 못한 사실도 확인됐다. 재판부는 “고인은 사고 전날에도 정규 근로시간 이후 대표와 퇴사한 직원의 후임자 면접을 논의했고, 다음날 오전 출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두통을 호소하고 휴식을 취하던 중 쓰러진 채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A씨 유족을 대리한 김용준·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법원 감정의 소견이 없이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은 판결”이라며 “지주막하출혈과 같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시행령에 명시돼 있는 전형적인 업무상 질병은 과로와 스트레스가 증명되면 별도로 진료기록감정을 거쳐 의학적 인과관계에 관한 소견을 확보하지 않더라도 상당인과관계를 판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