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취업한 병원에서 직원의 연장근무수당 최소화 방안을 마련하라고 요구받는 식으로 업무 압박에 시달리다 뇌출혈로 숨진 약사에 대해 대법원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3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종합병원 약사 A씨(사망 당시 40세)의 배우자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8일 밝혔다.
의약품 오제조 이어 연장수당 최소화 요구
1심 “업무 완벽성 추구하다 뇌출혈”
A씨는 약 1년6개월간 약사로 근무하다가 2016년 12월 충남 당진의 한 종합병원에 단기계약직 약제과장으로 이직했다. 그런데 취업 한 달 뒤인 이듬해 1월 실수로 의약품을 잘못 조제해 환자 B씨에게 건넸다.
하루 뒤 이 사실을 알아챈 A씨는 B씨 배우자를 찾아가 잘못 처방한 약을 돌려받고 새로운 약을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A씨가 비틀거리다가 넘어져 B씨 배우자가 일으켜 세우기도 했다. 약품 오제조 이후에도 A씨는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병원은 A씨에게 약제과 직원의 연장근무수당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또 근무시간 외에도 약제과 시스템 개선 방안을 고민했는데, 이 과정에서 간호부와 의견이 충돌했다.
이직 이후 두통이 생긴 A씨는 같은해 1월31일 한의원 진료를 받았다. 그런데 다음날 평소대로 퇴근했다가 자택에서 쓰러졌다. A씨를 발견한 남편이 즉시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이송됐지만, 열흘 만에 숨졌다. 상세불명의 지주막하출혈로 인한 뇌부종이 사인이었다.
유족은 스트레스로 인한 업무상 재해라며 유족연금 및 장의비 지급을 공단에 신청했지만, 객관적인 업무 관련 부담 요인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거부당했다. 그러자 유족은 2019년 8월 소송을 냈다.
1심은 업무상 재해가 맞다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A씨는 약제과장으로서 업무를 완벽하게 해내고자 하는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해 지주막하출혈에 이른 것으로 판단되므로 사망과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대리인 “개별 스트레스 요인 반영한 판결”
특히 병원의 ‘연장근무수당 최소화 방안’ 요구가 스트레스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봤다. 재판부는 “병원의 요구는 직원의 이익과 상반되는 것으로서 A씨에게 직원들에 대한 설득과 조정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짧은 경력에도 약제과의 총 책임자를 맡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란 취지다.
의약품 오제조에 따른 업무능력 평가 악영향에 대한 두려움과 약제과 시스템 개선방안 마련 관련 스트레스도 업무상 재해 인정의 근거로 들었다. 이와 더불어 평소 뇌혈관계질환이 없다는 점도 작용했다.
반면 항소심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뇌출혈을 일으켰다고 보기 어렵다며 유족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업무시간이 사고 전 4주 동안 1주 평균 40시간 정도에 불과해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그러나 대법원은 업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항소심을 다시 뒤집었다. 재판부는 “A씨는 뇌동맥류의 위험인자를 가지고 있던 상태에서 약제과를 총괄하는 지위로의 업무상 환경 변화와 약제과의 정비 및 오제조 사고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기존 질환이 자연적 진행 경과 이상으로 급격하게 악화해 뇌지주막하출혈로 발현돼 사망에 이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판시했다.
A씨 유족을 대리한 김용준·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업무시간과 실제 불이익 여부로만 업무 관련성을 판단할 것이 아닌데도 이를 잘못 판단한 원심을 바로잡은 판결”이라며 “병원 감정 없이 사회 규범적인 관점에서 뇌심혈관계질환에 대해 결론 내렸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