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공무원이 8년 넘게 화재를 진압하다가 희소암인 ‘육종암’이 발병해 숨졌다면 유해물질 노출에 따른 공무상 질병에 해당한다고 법원이 판결했다. 소방관 중 종격동 육종암이 발생한 사례는 처음으로 알려졌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단독(조국인 판사)은 순직한 소방관 A씨(사망 당시 50세)의 아내가 인사혁신처를 상대로 낸 공무상요양 불승인처분취소 등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고 27일 밝혔다.
8년간 면마스크 쓰고 화재진압
법원 “화학·발암물질 장기간 노출”
1996년 소방공무원에 임용된 A씨는 약 23년간 근무하면서 8년6개월가량 화재진압 업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2016년 10월 광주 소방안전본부로 발령받아 근무하던 중 2019년 2월 종양이 발견됐다. 이후 ‘전종격동의 섬유화 종격동염’ 진단을 받아 1년간 약물치료를 받았지만, 증상이 악화하자 이듬해 수술을 받기로 했다.
대학병원에서 다시 조직검사를 한 결과 ‘전종격동의 미분화 다형성 육종암’ 진단이 나왔고, 결국 2020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육종암은 전체 암 환자의 1% 정도를 차지하는 희소암으로 알려졌다.
유족은 인사혁신처에 공무상요양 승인신청과 순직·위험직무순직 유족급여를 신청했다. 그러나 “업무와 상병 발병에 대한 관련성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됐다. 그러자 A씨 아내는 지난해 6월 소송을 냈다.
법원은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인사혁신처의 처분을 뒤집었다. 육종암과 관련한 개인적 소인이 발견되지 않은 사실과 A씨가 평소 비흡연자였다는 부분이 뒷받침됐다.
특히 보호장구가 미흡한 채 화재진압에 나선 점이 육종암 발병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봤다. 재판부는 “고인은 화재현장에서 화재진압 및 화재원인 조사 업무를 수행하면서 여러 가지 유해 화학물질과 발암물질에 장기간 지속해서 노출됐다”고 설명했다.
재판부 설명에 따르면 실제 소방공무원들은 2000년대 초반까지는 공기호흡기 등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면마스크만 쓰고 화재를 진압했다. 게다가 교대근무자와 공기호흡기를 함께 쓰는 경우도 많았다. 화재조사 단계에서도 일반 방진마스크만 착용했다. A씨는 1996년부터 2002년까지 화재진압 업무에 투입됐다.
교대근무에 휴일 부족 “면역력 약화”
순직 인정, 위험순직 유족급여는 부정
A씨가 주야간 교대근무를 반복한 점도 공무상 질병의 근거가 됐다. A씨의 휴가일수는 2018년 3.5일, 2019년 5.1일에 그쳤다. 2019년 12월부터 사망 직전인 2020년 5월까지 시간외 근무시간은 총 816시간, 휴일근무일수도 20일에 달했다. 조 판사는 “고인에게 장기간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됐다고 보이고, 면역력에 악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이어 “종격동 육종암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유해 화학물질이 암 발병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의학적으로 규명돼 있지는 않다”면서도 “그러한 이유만으로 고인의 업무와 상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다른 원인이 발견되지 않았고, 통계적으로 소방관의 암 발병 위험이 크다는 분석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전제로 조 판사는 A씨가 순직공무원에 해당한다고 봤다. 다만 공무원 재해보상법에서 정한 위험직무순직공무원의 요건은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재난현장에서 입은 재해가 종격동암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취지다.
A씨 유족을 대리한 김용준·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이번 판결은 소방공무원 업무와 희소암종 사이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며 “특히 유해물질 노출 가능성 및 장기간 초과·야간·교대근무에 따른 업무상 과로 등이 유의미하게 반영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