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단체가 조례로 시행 중인 노동이사제가 뒷걸음질할 위기를 맞고 있다. 최근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에 노동이사를 도입하는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공공기관운영법)이 진통 끝에 국회를 통과했는데 정부가 개정 내용을 지방공기업법에도 적용하려 하면서다.
광역지자체 10곳 노동이사제 시행 중
“노동자 300명 이상이면 노동이사 2명”
20일 <매일노동뉴스> 취재 결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1소위원회는 지난 7일 회의를 열고 지방공기업법을 비롯한 26개 법안을 심사했다. 이날 테이블에 오른 지방공기업법은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같은당 서영교 의원이 각각 발의한 법안으로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로 도입한 지방공기업 등의 노동이사제를 법률로 보장하는 내용이다. 이 가운데 서영교 의원안은 최근 출범한 전국공공기관노동이사협의회와 논의 끝에 나온 법안이다. 박홍근 의원안은 노동이사의 정수 외에 다른 사항을 대통령령에 위임한 반면 서영교 의원안은 노동이사 정수뿐 아니라 자격과 권한, 근로관계 같은 사항을 법률로 정하고 있는 차이가 있다.
문제는 정수다. 서영교 의원안은 노동이사 정원을 2명 이상으로 하되 노동자 300명 미만은 1명을 두도록 하고 있다. 사실상 300명을 기준으로 노동이사 정수 확대를 열어 놓은 안이다.
이는 현재 노동이사제를 도입한 지자체 실정과도 부합한다. 서울시는 노동자 300명 이상인 공사 등에 노동이사를 2명 두도록 했고, 300명 미만 기관은 1명을 두도록 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해 광역지자체인 부산·인천·광주·대전·울산·경기·충남·전남·경남도 300명을 기준으로 노동이사 정수를 2명 이상으로 정했다.
노동이사를 1명만 두도록 한 내용은 지난달 국회를 통과한 공공기관운영법안 논의 과정에서 나왔다. 당시 국회는 노동이사 정수를 두고 격론을 하다 1명으로 정했다. 입법 취지상 1명을 초과해 임명해도 되지만, 재계와 야당의 반발이 큰 상황에서 2명 이상 노동이사를 두자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7일 행안위 법안1소위에서 다시 정원 얘기를 꺼냈다. 이날 회의에 출석한 고규창 행안부 차관은 “국가공기업은 1명으로 명시했기 때문에 지방공기업쪽에서도 1명으로 하되 현재 2명으로 운영되고 있는 일부 공사나 공단에 있어서는 임기를 보장해 주는 것으로 해서 1명으로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2명 이상인 노동이사가 임기를 마치면 후임을 임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정원을 줄이겠다는 얘기다.
“노동이사 추천에 전체 노동자 의견 반영 필요”
선출방식도 쟁점이다. 서울시의 ‘서울특별시 노동이사제 운영에 관한 조례’ 5조는 “노동이사는 공개모집과 임원후보추천위원회 추천 등에 따라 임명한다”고 정하고 있다. 그리고 6조에서 “노동이사는 공사 등 소속 노동자 중에서 1년 이상 재직한 사람으로 한다”고 정했다. 기관 소속 노동자 가운데 공개모집이나 임원후보추천위 과정을 통해 선출하는 방식이다. 이와 달리 개정 공공기관운영법은 노동이사 자격을 재직 3년 이상으로, 선출 방식은 노동자 과반수 동의를 받거나 또는 근로자대표(과반수노조 대표자) 추천으로 정하고 있다.
행안부는 이에 대해서도 공공기관운영법 준용을 강조했다. 고 차관은 “노동이사 추천방식은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국가공기업과 마찬가지로 과반노조가 있는 경우 노조 대표자가 추천하고, 과반노조가 없는 경우 근로자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가 추천하는 것으로 하되 구체적인 방법은 조례로 위임하도록 하는 방안이 타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이사 추천 방식은 노동계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다. 노조를 거쳐 추천하는 방식이 노동이사 역할을 하기에 용이하지만, 노조뿐 아니라 기관 전체 노동자를 대표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사 추천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맞선다. 변춘연 전국공공기관노동이사협의회 상임의장은 “노동이사 선출방식은 노동이사의 대표성 강화와 선출 과정의 투명성과 공정성 확보를 위해 근로자 전원 직접선거를 원칙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지자체가 노동이사를 노조 추천으로 정한 배경을 살필 필요는 있다. 지자체가 노동이사제를 속속 도입할 당시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는 법률로 보장되지 않았다. 조례와 법률 간 충돌을 피해야 했다. 과반수노조가 노동이사를 추천하도록 하면 주주나 임명권자의 비상임이사 추천권을 침해한다는 해석이 있어 도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노동이사 조합원 자격? 행안부 ‘모르쇠’
정부가 노동이사제 운용 관련 쟁점에는 별다른 개선책을 내놓지 않는 것도 문제다. 특히 ‘선출된 노동이사의 조합원 자격 유지’ 같은 쟁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상황이다. 비상임이사는 경영진에 속하기 때문에 각종 법률에서 노조에 가입할 수 없도록 하고 있어 지자체에 따라서는 조례로 조합원 자격을 정지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노동의 관점에서 경영을 견제·감시하는 노동이사 취지상 조합원 자격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때문에 기획재정부가 마련할 공공기관운영법 시행령과 노동이사제 관련 지침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 지방공기업 주무부처인 행안부는 이런 고민을 아예 내려놓고 있다.
국회도 행안부 태도를 비판했다. 지난 7일 법안심사1소위 회의록을 보면 김형동 국민의힘 의원은 “국가공기업은 정부가 (노동이사제 도입) 요구를 안 된다 해서 막았던 것이고 지자체는 자체적으로 필요하면 적극적으로 하시는 분들도 있어 상황이 다르다”며 “지방공기업에 따라 형태에 맞게끔 제대로 운영해 온 분들도 있는데 갑자기 1명이나 임기를 조정하거나 하는 것은 자율권 침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방자치의 자율성이나 독립성을 강조한다는 차원에서도 과감하게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지자체 노동이사들은 반발하고 있다. 마치 침대보다 크면 잘라서, 작으면 늘려서 죽였다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처럼 정해진 틀에 현실을 끼워 맞추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변춘연 상임이사는 “지방공기업법을 사실상 공공기관운영법의 하위법률처럼 취급하고 있다”며 “진통과 격론 끝에 불완전하게 통과한 공공기관운영법의 노동이사제 조항을 잣대로 이미 상당기간 자율적으로 내실 있게 운영해 온 지자체 노동이사제를 재단하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