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청호나이스 건물 전경.
정수기 수리기사가 용역위탁계약 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일했더라도 회사의 지휘·감독을 받았다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므로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청호나이스 수리기사가 제기한 소송에서 하급심은 엇갈린 판단을 내놓아 논란이 됐는데, 이번 대법원 판결로 정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코웨이·쿠쿠를 비롯해 유사한 형태로 근무하는 엔지니어들의 소송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근기법상 근로자성’ 두고 하급심 엇갈린 판결
판매수수료의 평균임금성, 2심에서 불인정
대법원은 11일 청호나이스 수리기사들이 낸 퇴직금 소송 2건을 선고했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이날 오전 수리기사 A씨 등 23명이 낸 퇴직금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어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수리기사 B씨 등 2명이 낸 퇴직금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했다.
두 사건 모두 수리기사의 ‘근기법상 근로자성’이 쟁점이 됐다. A씨 등 수리기사 23명이 제기한 소송건은 항소심에서 근로자성이 인정됐지만, ‘판매수수수료의 평균임금성’ 부분이 기각됐다. 이 부분은 대법원에서 ‘설치·AS 수수료’ 뿐만 아니라 ‘판매수수료’도 임금으로 인정됐다. 반면 B씨 등 2명의 소송은 1·2심에서 모두 인정되지 못해 상고심까지 이어졌고 대법원에서 근로자성을 인정받았다.
청호나이스 수리기사들은 회사와 서비스용역 위탁계약을 체결하고 정수기 설치 및 사후관리 업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수리기사들이 다수 퇴직하면서 퇴직금 지급 문제가 발생했다. 근로계약관계가 아닐 경우 회사가 퇴직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수리기사들은 퇴직금을 달라며 회사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두 사건 모두 1심에서는 근로자성이 인정되지 않았다. 1심은 수리기사에게는 취업규칙 또는 복무규정이 적용되지 않았고, 수리기사가 직접 고객과 접촉해 사후관리를 실시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A씨 등 23명이 낸 소송의 항소심은 1심을 뒤집고 수리기사도 노동자가 맞다고 판단했다. 근거로는 △회사가 서비스 요청을 받아 배정한 업무를 수행한 점 △업무 준수사항을 하달하고 교육을 실시한 점 △수리기사의 등급을 나눠 수수료 액수에 반영한 점 △용모와 복장 규정 등을 적용받은 점을 들었다.
수리기사가 받은 수수료는 일부만 인정됐다. 항소심은 ‘설치·AS 수수료’의 경우 업무 내용·난이도·건수 등을 평가해 매긴 등급에 따라 지급돼 평균임금 산정의 기초가 되는 임금에 포함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판매수수료’는 지급 여부를 수리기사들이 선택할 수 있어 회사의 지휘·감독을 받으며 근로를 제공하고 받은 대가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수리기사들이 평소 정수기를 거의 팔지 않다가 퇴직금을 높이기 위해 일정 기간 집중적으로 판매실적을 올려 악용할 수 있다는 취지다.
대법원 “판매수수료, 지휘·감독 아래 받은 근로 대가”
수리기사쪽 “종속적 관계 일했다면 영업수당도 임금 편입”
하지만 대법원은 ‘판매수수료’도 평균임금 산정의 기초가 되는 임금에 해당한다며 원심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수리기사들의 판매 활동 역시 회사의 상당한 지휘·감독 아래 이뤄지는 근로제공의 성격을 가진다”고 판단했다. 이어 “판매업무는 수리기사의 주요한 의무 중 하나이고, 제품 판매는 회사 사업 중 핵심 부문”이라며 “수리기사들은 실적이 부진한 경우 질책을 받거나 사무소로 복귀해 교육을 받고, 휴일 출근이나 당직근무 등 불이익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판매업무를 담당한 수리기사들이 계속적·정기적으로 판매수수료를 받았다는 점도 인정 이유로 언급했다.
한편 B씨 등 2명의 사건은 1·2심에서 모두 수리기사들이 패소했지만, 대법원이 근로자성을 인정했다. B씨 등은 다른 회사와 위탁계약을 맺었다가 회사가 청호나이스에 흡수합병된 후 계속 업무를 수행하다가 퇴직했다. 대법원은 A씨 등 사건과 마찬가지로 업무의 계속성과 지휘·감독을 인정해 이들이 근기법상 근로자가 맞다고 판단하며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A씨 등 23명을 대리한 이형조 변호사(법무법인 매헌)는 “특수고용 노동자 중에는 회사의 지시로 판매영업을 수행하고 영업수당을 지급받는 경우가 많다”며 “비록 고정적인 임금이 아닌 영업실적에 따라 지급받는 영업수당이라 하더라도, 근기법상 근로자로서 회사의 지휘·감독 아래 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퇴직금 및 각종 법정수당 산정시 판매수당 또는 영업수당도 임금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B씨 등 2명을 대리한 임동찬 변호사(법무법인 단)도 “지금까지 기업들이 근로자성을 감추기 위해 사용해 왔던 다양한 수단들이 더는 통용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다”며 “이번 판결로 많은 노동자들이 근기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청호나이스 수리기사들에 대한 재판은 계속 진행될 예정이다. 이달 25일 다른 수리기사들에 대한 대법원 선고가 예정돼 있고, 서울중앙지법도 수리기사 60여명의 퇴직금 사건을 심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