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에서 손을 들어 가부를 결정할 때 주견 없이 남이 시키는 대로 손을 드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에 오른 ‘거수기’의 뜻풀이다. 용례가 재미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현 이사회는 김 회장의 독주에 거수기 역할만 한다는 냉소 섞인 비판이 자주 들리곤 했다”고 용례를 소개하고 있다.
금융권 이사회 ‘원안가결’ 97%, 사외이사 무용
노동이사제 도입 필요성은 이 대목에서 출발한다. 올해 1월 참여연대 발표에 따르면 2017~2019년 3년간 금융지주회사와 은행 13곳의 이사회 결과 97.2%가 원안가결했다. 거수기에 다름 아니다. 물론 금융지주회사와 은행은 공공부문은 아니라서 공공부문 노동이사제 필요성에 직접 대입하기는 어렵다.
아쉽게도 공공기관의 ‘거수기 현황’에 대한 조사는 아직 없다. 다만 실제 사례는 즐비하다. 대표적인 게 한국수자원공사와 한국석유공사다. 4대강 사업을 수행한 수자원공사는 2009년 2조5천231억원이던 부채규모가 2013년 13조9천985억원으로 치솟았다.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를 수행한 석유공사도 2007년 64%였던 부채비율이 2016년 529%로 폭등했다. 내년에는 835%까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공기업·준정부기관·기타공공기관 같은 공공기관은 정부의 입김을 견제하고 운영을 투명하게 하기 위해 비상임이사를 뽑는다. 민간부문으로 치면 사외이사다. 그러나 이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천문학적인 부채를 뒤집어쓰는 사례가 여전히 빈발하고 있다. 끊이지 않는 낙하산 논란도 고려해야 한다.
“노동이사, 존재만으로도 투명성·신뢰성 강화”
공공부문 노동이사제 도입은 이런 맹점을 해소하는 데 첫 번째 목표가 있다. 조건영 서울시 투자출연기관 노동이사협의회 정책위원장은 “국내 이사회가 통념적으로 거수기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정보가 모자라 검토를 제대로 할 수 없어 경영진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며 “내부정보를 알고 있는 노동이사가 있는 것만으로 의사결정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재계와 노동이사제에 반대하는 일부 정치권은 노동이사제를 급진적인 노동정책의 표상으로 삼고 있다. 한국경총이 최근 4년제 대학 경제·경영교수 200명을 설문조사해 발표한 결과를 보면 노동이사제가 우리나라 경제시스템에 부합하지 않고(57%), 노동이사제 도입으로 기업경쟁력이 악화(61.5%)할 것이며 노조쪽으로 힘의 쏠림 현상을 심화할 것(68.5%)이라고 답했다.
그렇지만 노동이사제의 진의는 이와 다르다.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노동이사제는 공공기관의 공공성과 사회적 가치, 그리고 효율성까지 포함한 기관의 고유한 설립 목적을 보다 잘 달성하자는 것”이라며 “노동자를 단순한 피용자로 두지 않고 경영 이해당사자로 파악해 경영책임을 같이 지는 등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관 공통의 내외적 도전에 노사가 공동 대응함으로써 노사화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이런 방식의 경영참여 확대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공기업 지배구조 가이드라인에서 노동이사제 도입을 강조하고 있다.
“경영과 노동은 등급이 다르다? 그릇된 엘리트 의식”
그럼에도 재계가 민간 확산을 빌미로 반대하고, 일부 정치권이 이에 동조하는 것은 그릇된 경영관이라는 지적이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경영권을 성역화해 나눌 수 없다는 태도가 경영 불투명성을 강화하고, 경영자를 제왕적으로 만든다”며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해도 문제가 없다는 게 역사적 경험으로 드러났고 오히려 주인의식을 강화해 기관 경쟁력을 높이는 제도임에도 경영과 노동은 등급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그릇된 엘리트 의식”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노동이사제도 다양한 개선이 필요하다. 노동이사의 자격과 선출 방식, 노조 대표자와의 관계 그리고 일부 기관이 선행했던 노조추천이사와의 차이 등 논의해야 할 지점은 많다.
그렇지만 이미 지난해 발의된 3건의 관련 법안이 국회에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정부·여당의 직무유기라는 지적이다. 게다가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를 2017년 대선 과정에서 공약으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정과제로 정하고도 5년간 허송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도 지난달 22일 한국노총을 찾아 노동이사제 정기국회 통과를 촉구했지만 무산이 유력하다.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를 도입하기 위한 방법은 12월 임시국회 소집이 유일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