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낙후된 환경에서 귀가 아플 정도로 일했습니다. 기계·장비·환경이 좋아진 상태에서 측정하고 이상이 없다고 하니 억울합니다. 철판 위에 철판을 올려놓고 망치로 쳐서 소음을 측정해 보고, 그래도 소음이 안 나온다고 하면 결과에 승복하겠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3년 이상 소음에 노출이 안 됐다고 하는데 이해할 수가 없네요.”
장기간 철판을 접는 절곡작업을 하며 난청이 발생한 A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장해급여 지급을 청구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공단은 A씨가 80데시벨 이하의 소음에 노출돼 산재 인정기준에 미치지 않는다며 소음노출 이력과 난청 간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시행령에 따르면 ‘85데시벨 이상의 소음에 3년 이상 노출되고 한 귀의 청력 손실이 40데시벨 이상’인 경우 산재로 인정한다.
절곡작업 노동자 ‘75.7~80.1데시벨’ 구간 소음 노출
근로복지공단, 85데시벨 미충족 이유로 장해급여 부지급
그런데 A씨는 최근 법원에서 인정기준에 미달하는 저강도 소음에 노출됐더라도 난청이 업무상 질병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소음 노출 기간도 소음성 난청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A씨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산재 전문가들은 근로복지공단이 지난해 3월 인정기준을 완화해 문턱을 낮췄지만, 여전히 시행령을 일률적으로 해석해 불승인하는 사례가 많은 현실에서 이번 사안의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단독부(김연주 판사)는 지난 15일 절곡작업 노동자 A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장해급여 부지급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취지로 조정을 권고했다. ‘조정권고’는 법원이 행정처분 감경의 여지가 있을 때 행정부서에 직권취소 및 재처분을 권고하고, 소송을 낸 원고에게는 소송 취하를 권고하는 것을 뜻한다.
A씨는 1989년 6월부터 2019년 2월까지 약 22년간 철강업체에서 절곡작업을 수행해 왔다. 이후 2019년 3월 감각신경성난청을 진단받았다. A씨는 난청이 작업장 소음으로 인해 발생했다며 공단에 장해급여를 청구했다. 하지만 공단은 지난해 5월 업무관련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심사청구도 기각했다.
근로복지공단 인천병원은 A씨가 일한 작업장의 소음 정도가 인정기준치 이하인 ‘75.7~80.1데시벨’이라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두 차례의 특별진찰 결과가 불일치한 점과 이미 난청 진료를 받은 이력도 불승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A씨는 지난해 12월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원고 대리인 ‘저강도 소음 난청’ 외국논문 제시해 ‘반전’
한민옥 변호사 “노출기간 따라 난청 가능 확인한 사건”
A씨를 대리한 한민옥 대표변호사(법률사무소 율)는 재판에서 소음의 노출 기간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60~70데시벨 사이의 저강도 소음에 지속해서 노출된 경우에도 청력이 상실될 수 있다는 외국논문도 찾아내 법원이 지정한 감정의에 진료기록감정을 신청했다.
감정의는 기타 난청이 혼재된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며 ‘소음성 난청’ 소견을 냈다. 저강도 소음에서도 노출 시간 및 기간에 따라 소음성 난청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무경력이 난청 발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고도 했다. 또 같은 나이대에 비해 난청이 심각하다고 봤다. 결국 재판부는 A씨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공단에 재처분을 권고하며 소송을 종결했다.
한민옥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저강도 소음에서도 노출 기간이 길 경우 충분히 소음성 난청이 발병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사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특히 외국 의학연구를 확보해 감정의의 소견을 받아낼 수 있었고, 이번 소송이 이정표가 돼 유사한 사안에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공단은 85데시벨에 아주 근접하는 소음에 노출된 경우에도 시행령 규정을 들어 산재 인정을 거부하는 사례가 종종 있는데, 이 사건은 시행령을 왜 형식적으로만 해석해 적용하면 안 되는지를 극명히 보여준 사례”라고 강조했다.
권동희 노무사(법률사무소 일과사람)는 “80데시벨 이하에서 소음성 난청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부분은 이미 의학적으로 인정됐다”며 “그런데 공단이 85데시벨 이상 기준의 시행령을 고집하고 있다. 이 기준은 예시적 규정에 불과할 뿐이지 기준치 이하라고 하더라도 산재로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