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후보자의 ILO 사무총장 진출시 ‘노동 선진국’으로서 우리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1일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의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 후보 출마 소식을 전한 정부 보도자료 내용 중 일부다.
4일 ILO 자료를 살펴보면 노동 선진국이라는 정부의 평가는 낯뜨거운 자화자찬에 가깝다. 강 후보 당선을 지지하기에 앞서 국제기준을 밑도는 우리나라 노동기본권 실상을 시인하고 개선해 나가겠다는 정부 차원의 약속을 선행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ILO 협약 비준 여전히 ‘미흡’
ILO 협약은 8개의 기본협약과 4개의 거버넌스(우선순위) 협약, 그 밖의 기술협약(Technical Conventions)으로 구분된다. 한국은 지난 4월 기본협약 3개를 추가 비준하면서 전체 187개 협약 중 32개를 비준한 나라가 됐다. 기본협약 8개 중 7개, 우선협약 4개 중 3개, 기술협약 178개 중 22개다.
강 후보와 경쟁하는 후보 4명은 호주·토고·남아프리카공화국·프랑스 출신이다. 이들 나라가 비준한 협약을 보면 호주 58개, 토고 28개, 남아프리카공화국 27개, 프랑스 128개다. 비준수로만 보면 우리나라가 토고나 남아프리카공화국보다는 많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토고·남아프리카공화국·프랑스는 기본협약 8개 전체를 비준했다. 호주는 7개로 우리와 같지만 전체 비준 협약수(58개)가 월등히 많다.
기본협약 중 우리가 비준하지 않은 강제노동 철폐협약(105호)은 ILO 회원국 187개국 중 11개국만이 비준하지 않고 있다. 사상이나 파업 참가를 이유로 처벌해 강제노동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협약이다. 1957년 채택된 협약으로 국제노동기준이 된 지 오래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공약에서 105호 협약을 포함해 기본협약을 모두 비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국가보안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이 이 협약 내용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우선순위 협약 중 우리나라가 비준하지 않은 근로감독(농업)협약(129호)의 무게감도 기본협약 못지않다. ILO는 전체 협약의 실효성 있는 이행을 위해 회원국에서 우선협약을 반드시 비준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농업·임업 사업장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과 휴게·휴일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 5명 미만 사업장인 곳이 적지 않아 근로감독 사각지대에 있다.
ILO 개선 권고도 미이행
“회원국에 협약·권고 이행 설득할 수 있나”
한국 정부는 ILO 권고도 제대로 수용하지 않고 있다. ILO 결사의자유위원회는 2009년과 2013년 필수공익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필수유지업무제 개선을 권고했다.
2017년 ILO 이사회에서 채택한 결사의자유위원회 보고서에서는 교사·공무원노조 설립신고 불인정, 교사·공무원 정치활동 금지, 파업을 이유로 한 업무방해죄 적용과 손배·가압류 등을 문제로 지목하며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교사·공무원 정치 자유 문제는 1996년부터 개선을 권고해 온 주제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가 개선한 것은 교사·공무원노조 설립신고 문제뿐이다. 손배·가압류는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가 “노동자에 대한 보복 조치”라며 개선을 권고할 정도다.
이미 비준한 협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지적받기도 했다. ILO의 2021년 국제노동기준 적용 보고서에는 한국의 법과 제도가 동등 보수 협약(100호)과 고용과 직업에서의 차별 협약(111호)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나와 있다. 성별이나 고용형태를 이유로 임금차별이 발생하는 문제 등을 지적했다.
노동계는 강경화 후보가 공약에서 한국의 노동권 실상과 해결방안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ILO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국제노동기준을 확립하고 이행을 감독하고, 협약 미비준 국가에 비준을 설득하는 일”이라며 “강 후보는 이런 역할에 대해서 아무런 견해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한국노총은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강 후보가 노동문제에 문외한인 데다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외교적 위상 등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입장을 정리할 계획이다.
강 후보 출마를 계기로 정부가 노동 후진국임을 실토하고 노동 선진국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는 “정부가 강 후보 당선을 뒷받침하고자 한다면 손 놓고 있는 ILO 협약 비준을 더 많이 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이행하는 것이 맞다”며 “강 후보도 이런 한국 정부의 활동을 배경으로 삼아 코로나19 이후 부각하는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협약을 만들고, 더 많은 나라가 협약을 비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