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2026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사망사고 만인율을 줄이겠다는 목표를 담은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추진하고 있다. 처벌과 규제만으로는 더 이상 산업재해를 줄일 수 없다는 평가와 함께 추가적인 산업안전보건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고 했다. 개편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것은 자기규율 예방체계를 중심으로 삼은 위험성평가다. 아주 새로운 제도는 아니다. 2013년 도입했으니 이미 10년째 시행 중이다. 그동안 위험성평가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그런데 위험성평가를 중대재해 감축의 핵심 의제로 꺼내든 정부는 노사가 함께 사업장 위험요인을 파악하고 개선대책을 수립·이행하는 제도가 정착하면 재해감소로 이어지리라 기대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환영과 함께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매일노동뉴스>가 현장에서 작동 가능한 위험성평가 제도 개선방안을 살펴봤다. 안전보건공단과 함께하는 ‘중대재해 감축, 노사가 함께’ 캠페인의 일환으로 공동기획했다. <편집자>
 

지난해 10월4일 새벽 4시께. 경남 창원 현대비앤지스틸 냉연공장에서 하청노동자 A씨(사망당시 63)가 철제 코일 포장작업 중 넘어진 코일에 깔려 숨지는 중대재해가 발생했다. 그는 1차 밴딩 처리가 된 철제 코일을 종이와 얇은 철판으로 된 끝으로 싸는 업무를 했다. 오래된 받침목이 철제 코일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발생한 사고로 추정됐다. 사고는 우연히 발생하지 않았다. 같은해 4월6일 하청업체는 위험성평가 과정에서 “빅코일을 받을 때 작업 공간이 협소하고 받침목이 평탄하지 않아 코일을 받다가 코일이 굴러 코일 사이에 작업자 협착사고 위험”이 있다고 진단했다. 받침목 교체와 협력업체 통합회의에서 크레인 작업자와 소통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요청했지만 후속 조치가 미흡했다.

‘위험성평가’ 도입 10년,
거추장스러운 서류작업 전락
실효성 논란 키워

위험성평가는 사업주가 노동자를 참여시켜 건설물, 기계·기구, 설비 등의 사업장 내 유해·위험요인을 찾아내고, 스스로 개선대책을 수립·시행하는 자율안전관리 제도를 말한다. 제도 실시주체는 사업주다. 모든 사업장에서 최초로 평가를 한 뒤 매년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산재가 발생하거나 생산시설을 변경하는 등의 사유가 있으면 수시평가도 한다.

제도 적용의 절차는 그리 복잡하지는 않다. 재해발생 원인을 사업주·안전보건관리자·노동자 등이 찾아내고, 피해 가능성(빈도)과 중대성(강도)을 추정한다.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기계기구를 개선하거나 작업순서를 변경하는 등 노동환경 개선으로 위험성을 낮춘다. 개선 사항을 현장에 적용한 뒤 실제 변화가 있었는지 재차 점검하는 순서를 밟는다. 산재예방을 위해 사업주와 노동자가 논의를 지속하면서 개선점을 찾아가는 것이 제도 취지이자 핵심이다.

위험성평가 도입 논의에 촉발은 2000년도 초반으로 거슬러 간다. 2000년 8월부터 5명 미만 사업장으로 산업안전보건법 적용이 확대하면서 정부가 감독해야 할 사업장 수가 급증했다. 산업·고용구조 급변화로 사업장 재해 유형까지 급변할 때, 산재 예방 인력과 예산은 뒤따르지 못하는 문제가 누적했다. 정부는 2004년 위험성평가 도입방안 연구 용역을 하고, 2010년 시범사업을 거쳐 2013년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으로 제도를 도입했다. 2014년 3월부터 현장에서 시행됐다.

하지만 시행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제도는 현장에 안착하지 못했다. 제도를 따올 때 전문가·노동계의 우려가 현실화하면서다. 위험성평가는 “일터 위험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업장 조직이 스스로 관리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영국 ‘루벤스 보고서’를 바탕으로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져 전 세계로 퍼졌다. 안전조직 시스템 개선, 사업주의 책임성 강화, 노동자 참여 강화를 안전보건 관리의 원칙으로 삼는다. 우리가 이식한 위험성평가는 사업주 책임성과 노동자 참여 부분을 쏙 빼놓으며 가동했다. 낮은 노조 조직률, 사용자쪽으로 기울어진 노사관계 등 노동자를 배제하는 한국 문화와 결합하면서 위험성평가는 서류에만 존재하는 안전보건활동으로 전락했다.

손진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본 취지와 달리 사업주는 거추장스러운 서류작업을 하는 것으로 치부하고, 관리자 중심으로 형식적으로 제도를 운용하면서 유해·위험에 노출돼 일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았다”며 “사고 위험을 예측해 예방조치 하라는 취지가 작동하지 않으니 위험성평가를 진행한 사업장에서도 중대재해가 발생했다”고 평가했다. 강성규 가천대 길병원 교수(직업환경의학)도 “사업주가 자기 사업장에 맞게 예방계획을 세워 사고를 막겠다는 자율안전은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았다”며 “대기업은 안전부서가 자율안전을 강조해도 구매부서의 힘을 넘지 못하고, 중소기업은 자율안전이라는 개념조차 자리 잡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정부 방관 속에 사업장 3곳 중 1곳만 ‘이행’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안전보건관리 증빙문서로 제도 변질

제도를 도입한 정부도 힘을 싣지는 않았다. 안전보건관리를 위한 하나의 기법으로 본 까닭에 제도를 이행하지 않아도 기업을 처벌하지 않았다. 안전·보건관리자에 주어진 실무로 규정하고, 사업주가 해당 업무 수행을 지시하지 않은 경우가 적발되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을 했다. 노동부는 위험성평가를 하지 않더라도 처벌하지 말라는 취지의 지침을 지난 2017년 1월 내놓기도 했다.

실제 이행하는 사업장도 적었다. 가장 최근 실시한 2019년 작업환경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사업장 14만3천716곳 중 위험성평가 최초 평가를 한 곳은 5만1천52곳(35.5%)이다. 이 중 매년 정기 평가를 한 곳은 3만 4천100곳(23.7%)으로 더 적었다. 해당 조사는 1993년부터 5년 주기로 전국 제조업체 작업환경 실태를 살피는 조사다.

유노조 사업장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노총은 지난 2월17일부터 같은달 27일까지 산하 439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사용자 의무 준수 실태조사를 했더니 106곳(24.1%)이 위험성평가를 하지 않았다.

무덤 속에서 잊혀 가던 위험성평가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시행으로 새삼 주목받게 된다.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라 사업주가 이행해야 할 안전보건 확보의무 중 하나로 위험성평가를 활용하는 현장이 늘었다. 특히 건설사를 중심으로 안전보건관리의 증빙문서로 갖추려는 분위기가 확산했다.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노동부 ‘자기규율 예방체계’ 구축 위해 위험성평가 대대적 손질
노조·노동자 참여 확보 방안 마련해야 현장 안착 성공

정부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과 지난 1월 내놓은 산업안전보건감독 종합계획은 ‘면피성’ 혹은 ‘규제 완화’로 평가받던 위험성평가를 재정립하겠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노동부는 중대재해가 줄지 않는 이유로 “규제·처벌 위주의 행정으로 기업이 타율적 규제에 길들어져 자체적으로 위험요인을 개선하는 시스템과 역량이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위험성평가를 중심으로 하는 ‘자기규율 예방체계’ 구축을 새로운 목표로 제안했다. 올해에는 산업안전보건 정기감독 대신 위험성평가 특화점검을 하기로 했다. 위험성평가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집중적으로 살핀다는 계획이다. 지난 3월에는 위험성평가 절차 중 ‘위험성 추정’ 과정을 빼고 노동자 참여 확대, 결과 공유 등의 변경 내용을 담은 ‘사업장 위험성평가에 관한 지침’을 행정예고했다.

전문가·노동계에서는 우려·기대의 모습이 동시에 포착된다. 양대 노총은 위험성평가를 현장에 안착시켜 작동시켜야 한다는 큰 틀에는 공감하지만 노동자 참여를 보장하지 못하는 점은 한계로 꼽고 있다. 이를테면 정부는 위험성평가 전 과정에 노동자 참여를 추진하지만 활동을 보장할 시간과 교육기회, 이의제기 권리를 보장하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노조가 강력한 곳은 그나마 제도 적용 가능성이 높겠지만 무노조 사업장이거나 노조 힘이 약한 곳은 이행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사고성 중대재해가 집중 발생하는 건설현장의 경우 정부 차원의 건설부문 노조에 압박이 행해지는 중이어서 노조 참여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위험성평가 과정에 ‘위험성 추정’을 제외하기로 한 점도 논란이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노동부는 재해 가능성과 중대성을 추정하도록 한 규정이 모호해서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다. 개정 고시를 통해 절차를 생략했다. 이 경우 고시 개정 이전의 틀에 맞춰 위험성평가를 진행해 온 사업장은 규제가 완화되는 효과가 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안전공학)는 “위험성 추정이야말로 위험성평가가 다른 안전활동과 차별되는 핵심 절차”라며 “위험성 수준을 정하는 추정 과정에 작업자들이 참여해 논의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노동가 이를 빼 버렸다”고 지적했다. 반면 노동부는 “위험성 빈도와 강도를 계량적으로 계산해 평가하도록 한 기존 제도는 어렵고 복잡해 중·소규모 사업장에서 제도를 이행하고 적용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며 “작은 사업장에서도 쉽고 간편하게 유해·위험요인을 찾아내 근로자와 함께 개선해 나가려고 노력할 수 있도록 하려는 점이 개편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개정 위험성평가 지침은 국무총리실 규제심사를 거쳐 이달 중으로 시행될 예정이다. 노동부는 이 제도를 올해 300명 이상, 2024년 50~299명, 2025년 50명 미만 사업장으로 단계적으로 의무 적용하는 방안을 추가 추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