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노동자에게 지급해야 할 퇴직금을 금융회사에 맡겨 운영한 뒤 퇴직 후에 일시금이나 연금으로 지급하는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된 지 16년이 흘렀다. 퇴직연금 가입자는 2019년 기준 800만명으로 2천만명이 가입한 국민연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퇴직연금 납부액은 2019년 기준 34조1천억원으로 같은해 국민연금 보험료 납부액 47조8천억원의 72% 수준에 달한다. 결코 적지 않다. 정률(보수총액의 8.33%)로 납부하는 특성상 사업장 규모가 클수록 보험료가 높아서다.
그러나 퇴직연금의 노후 대비 기능은 실종 상태다. 퇴직연금제도 도입 당시 노후 소득대체 기능을 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자영업 준비자금으로 쓰인다. 은퇴시 연금이 아닌 일시금 수령을 선호하는 문화 탓이다. 이렇다 보니 여전히 국내 노후소득보장은 올해 기준 소득대체율이 43.5%에 불과한 국민연금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날로 노령인구가 증가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개선이 시급하다.
“한국 퇴직연금, 이름만 연금인 퇴직금”
‘연금의무화·국민연금공단 참여’ 대안 제시
사무금융노조와 금융노조, 그리고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강은미 정의당 의원은 16일 오전 서울 중구 사무금융노조에서 ‘퇴직연금 개혁,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주제로 정책 토론회를 열고 퇴직연금 현황과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발제를 맡은 양재진 연세대 교수(행정학)는 “퇴직연금이 아니라 여전히 퇴직금”이라고 설명했다. 양 교수에 따르면 2019년 퇴직금 수령액 기준으로 73.7%, 계좌기준으로 97.3%가 연금이 아닌 일시금형태로 퇴직급여를 수령한다. 그는 “한국 퇴직연금은 이름만 연금일 뿐 사외적립 퇴직금으로 이용돼 노후소득보장 기능을 상실했다”고 강조했다.
가입자 수에서 드러나듯 사각지대도 많다. 도입이 의무가 아닌 탓이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규모가 작을수록 도입률이 뚝뚝 떨어진다. 5명 미만 사업장 도입률은 10.3%에 불과하다. 10명 미만 사업장 32%, 30명 미만 사업장 55.3%다. 50명 미만부터는 비율이 크게 증가한다. 77.6%다. 100명 미만 79.5%, 300명 미만 84.6%, 300명 이상 91.4%다.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퇴직금을 퇴직연금으로 단계적 전환하는 걸 의무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시급 지급을 방지하고, 기금 형태로 만들어 국민연금공단이 국민연금과 별도로 제2연금을 운용하도록 하는 ‘준공적연금화’ 방안이다.
국민연금공단이 아예 민간시장에 ‘플레이어’로 참여하는 방안도 있다. 양 교수는 “준공적연금화로 퇴직연금 시장을 확대하고 국민연금공단이 민간시장에 참여해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는 안”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민간 사업자의 반발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네덜란드, 노사합의로 산별연금 도입
“산별퇴직연금, 비정형 노동자 포괄 가능”
산별연금 구상도 있다. 네덜란드는 특정 산업이나 업종의 노사 대표가 직역연금 도입을 합의하고, 적용 노동자가 60%를 넘으면 동종 산업 나머지 기업도 의무적으로 직역연금에 가입하거나 동등한 수준의 기업연금을 제공하도록 한다. 같은 산업에 있는 노동자를 의무적으로 퇴직연금에 가입시켜 노후소득보장 체계의 한 축을 구성하는 제도다.
송원근 경상대 교수(경제학)는 “퇴직연금 가입을 강제하기 어려운 플랫폼 노동자 같은 비정규 노동자를 산별연금으로 구성해 노후소득보장 체계로 유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존 퇴직연금제도가 개인별 계좌를 관리하는 형태다 보니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없고, 이로 인해 수익률이 낮아 수급 시점의 수령액이 낮아 수급자가 연금보다 일시금 수급을 선호하는 것을 개선하려는 노력이다.
이재진 사무금융노조 위원장은 “수급 시점의 수령액이 남은 노후를 보장하기 어렵다 보니 일시급으로 받아 자영업에 나서는 악순환이 반복하는 게 현행 퇴직연금제도의 핵심 문제”라며 “이를 기금화해 국민연금공단이 하는 해외투자·부동산투자 같은 투자 포트폴리오로 수익을 내 수급 시점의 수령액 규모를 늘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