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복지공단이 코로나19 확진 뒤 숨진 택시노동자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로 판정했다. 역학조사에서 감염경로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노동환경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일하다 질병에 걸린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용자가 불특정한 다중이용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감염됐을 때 산재로 인정받는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60대 택시노동자 확진 한 달 뒤 폐렴으로 숨져
30일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지난 24일 심의회의에서 택시노동자 안아무개(사망당시 66세)씨 죽음을 산업재해로 판정했다.
서울 성북구 택시회사에 속한 안씨는 오후 4시부터 다음달 새벽 4시까지 하루 12시간씩 주 6일을 일했다. 지난해 8월29일부터 오한·몸살감기 증세가 나타나자 세 차례에 걸쳐 병원 치료를 받았으나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같은해 9월1일 두 번째 진료 후 자택에서 쉬었으나 이튿날에는 다시 일터로 나갔다. 이후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했고, 9월4일 보건소에서 코로나19 검사 후 다음날 양성 판정을 받았다. 확진 당일날부터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지난해 10월4일 폐렴으로 숨졌다. 코로나19 확진 후 불과 한 달여 만이다.
방역당국 역학조사에서는 감염경로 미상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언제, 누구에게 감염됐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의미다. 고인의 유족은 코로나19로 인한 죽음이 산재에 해당한다며 올해 7월 공단에 유족급여를 청구했다.
법원과 공단은 산재 증명책임이 업무상 재해를 주장하는 노동자에게 있다고 본다. 일하다 질병에 걸렸는지를 확실히 증명하지 않으면 산재 승인이 어려운 구조다.
유족측은 가족감염이 없는 데다 안씨가 업무 외 개인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매우 적었다며 일하다 감염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주장했다. 질병판정위 판단도 다르지 않았다. 질병판정위는 “고인의 코로나19 감염경로가 명확하지 않지만 발병 전 사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의 발병이 확인되지 않고, 가족 내 감염이 확인되지 않은 점, 택시기사의 직업적 특성상 밀폐된 공간에서 불특정 다수와 밀접한 접촉이 가능해 업무수행 중 감염을 배제할 수 없다”며 “고인의 상병은 업무상 요인에 의해 발병한 것으로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결론 내렸다.
노동자측 입증책임을 완화한 질병판정위 판정이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다. 공단은 ‘감염병의 업무상 질병 조사 및 판정지침’을 제정해 3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여기에 무증상감염 등 감염경로 파악이 어려운 경우 산재 판단 절차를 설명하고 있는데 ‘업무수행 과정에서 감염될 가능성’을 기준으로 삼아 조사하라는 내용이 들어갔다. 작업환경이나 사업장 내 집단감염 여부, 방역지침 준수 여부, 재해자의 감염병 위험요인 노출 등을 고려해 ‘가능성이 큰지 작은지’ 살펴보도록 했다. 노동자 입증책임을 완화한 조치다.
다중이용시설 노동자 산재 승인 가능성 커져
공단 지침 제정 이후 역학조사에서 정확한 감염경로가 확인되지 않은 노동자 여러 명이 산재로 인정받았다. 공단 관계자는 “코로나19 백신 접종 이후 후유증이 발생한 간호조무사가 역학조사에서는 백신과 인과관계가 없다고 나왔지만 업무와 백신접종 간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해 산재로 승인한 바 있다”며 “산재 심사 과정에서 역학조사 결과를 참고는 하되 업무상 인과관계를 면밀히 따져 판단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유족측을 대리한 권영일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이든)는 “어느 시점에 누구에게 걸렸는지 모르는 것이 감염병의 특징인데, 질병판정위가 가능성을 기준으로 삼아 산재를 승인한 것은 산재노동자 수급권을 보장하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결정”이라며 “택시나 버스 등 다중이용시설 노동자가 감염원 미상으로 확진됐을 때도 산재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생겼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