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마다 업체가 바뀌니까 처우개선을 요구하기도 어렵고, 임금도 3년 동안 거의 동결이에요. 업체가 바뀔 때 처음에만 조금 오르고…. 원청 감독들은 파견직원 다루듯 업무를 시키면서 정규직 전환 시점에서는 정규직 전환 대상이 아니라고 하니까 답답하죠.”
1998년 계측제어 업무에 처음 뛰어든 김기왕씨는 20년 경력을 가진 베테랑이다. 일하는 동안 발전 5사 중 3개사, 용역업체 8곳을 경험했다. 현재는 용역업체 ㈜우진엔텍 소속으로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한다. 일할수록 숙련도는 높아졌지만 고용불안 그림자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용역업체 신분으로 짧게는 3년, 길게는 6년에 한 번씩 소속이 바뀌는 탓이다. 용역업체 변경 시기에는 온신경이 곤두선 채 일한다고 한다. 이번에는 고용이 유지될 수 있을지, 새로 들어온 업체의 처우는 어떨지 머릿속이 복잡하다고 했다. 김씨는 “업체가 바뀌기 전후 6개월 사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바뀌고 다친다”고 설명했다.
발전소 안 계측제어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노·사·전문가 협의체 논의 시기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경상정비 노·사·전 협의체에서 지난해 1월 ‘계측제어 경상정비 소분과’가 신설된 뒤, 지금까지 사내(발전 5사)위원 10명·근로자위원 3명·전문가위원 2명이 정규직 전환을 위한 논의를 이어 오고 있다. 지난 5월 9차 회의 끝에 전문가위원은 “계측제어 분야는 가이드라인상 용역에 가까워 정규직 전환 대상에 포함된다”며 ‘한전KPS로 직접고용’을 제안했다. 전문가 조정안을 토대로 노동자들은 발전 5사와 한국전력공사의 자회사이자 준시장형 공기업인 한전KPS에서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하는 상황이지만, 발전 5사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1년이 채 안 남은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간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일 정규직 전환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김기왕(우진엔텍)·박인범(수산ENS)·제정모(오르비스) 등 근로자위원 3명과 심길섭 수산ENS노조 위원장을 만나 속내를 들었다. 오전 서울 용산구 한 모임공간에서 만났다.
“최저임금 받는 신입, 경력 늘어도
3년 주기 계약에 고용불안”
계측제어 노동자는 발전기가 정상운영되는지 확인하는 예방점검 업무와 발생한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예방정비 업무를 한다. 표준석탄화력발전소 기준 터빈·보일러·전산 파트로 업무가 구분된다. 통상 발전기 2개 호기당 한 팀으로 약 12명이 계측제어 업무를 수행한다. 한국 한전KPS 소속 정규직 노동자(139명)를 제외한 250명의 노동자는 민간 정비사(수산ENS·우진엔텍·리트코·금화씨앤이·오르비스)에 속해 일하고 있다.
김기왕 : 화력은 주로 석탄을 주원료로 사용해요. 석탄이 원활하게 공급되고 있다는 신호가 정상작동해야 하는데, 석탄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센서가 고장 났거나 전송터미널이 고장 나 석탄이 공급되지 않으면 석탄 연소가 안 돼 이상이 생겨요. 석탄이 정상 공급되고 있는데 센서 고장으로 기계가 잘못 인지해 바람을 차단하면 연소하지 못하게 되는 식이죠. 보일러는 가열되고 압력이 올라가고…. 문제가 생길 때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게 우리 일이에요.
계측제어 업무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으면 발전이 정지되는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수많은 경상정비 업체 중 규모가 큰 소수 민간정비사가 업무를 주로 담당하는 이유다. 하지만 계측제어 노동자 대부분은 ‘프로젝트 계약직’이라는 근로계약을 맺고 ‘기한 있는 정규직’으로 일한다. 계약기간은 통상 3년으로, 때에 따라 1~3년이 연장된다. 계약기간이 만료된 대다수 사업소 계측제어 노동자는 3~6개월 단위로 계약을 연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정모 : 업체 변경 과정에서 고용보장이 명목상으로 이뤄지는데 사람들이 많이들 나가요. 그 과정에서 직원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거든요. 일하는 중 사고를 쳤다고 하면 잘릴 수 있다는 위기감도 있고 살아남아 계약해야 하니까 못 버티는 경우도 다반수죠. 업체 바뀔 때마다 15~20% 정도는 사람이 바뀌는 것 같아요.
김기왕 : 임금도 인상이 안 돼요. 처음 근로계약 맺을 때는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물가인상 폭만큼만 인상돼요. 그 다음해에는 지난해 인상했으니 올해는 참자고 하고, 계약 종료까지 1년 남은 때는 재계약이 이뤄지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회사는 돈 챙겨 나갈 생각에 임금 동결하고…. 3년에 딱 한 번 오른다고 생각하면 돼요.
“결국 회사가 필요에 따라 임금 올려 주는 거죠.” 김기왕씨 말이 끝나자 제정모씨가 한마디 보탰다. 김기왕씨는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오래 살아남았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심길섭 위원장은 “찾아보면 최저임금이 안 되는 직원도 있다”며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소급하는 형태로 임금을 주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원청인 발전 5사는 용역업체 소속 계측제어 노동자의 입사부터 퇴사까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상시적인 업무 지시도 내린다고 한다.
심길섭 : 원래 업무가 현장 대리인을 거쳐 현장 직원에게 와야 하지만 감독이 현장직원에게 문자나 전화로 바로 업무지시를 내려요. ‘어디 점검 좀 돌아 주세요’ ‘비가 오니 물이 찰 수 있는 곳 둘러봐 주세요’ 같은 지시요. 다들 단체대화방 하나씩은 있을 걸요?
심씨의 말에 네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모든 권한을 쥔 원청에 관한 증언이 이어졌다.
박인범 : 용역형태로 설계돼 정해진 인원대로 운영돼야 해요. 한 명이라도 빠지면 인건비가 줄어들죠. 한 명을 추가 채용하려면 발전소에 보고하고, ‘이런 사람 채용해도 되겠냐’고 물은 뒤 오케이 사인을 받아야 채용할 수 있고요.
김기왕 : 원청이 특정 직원을 계약해지하라는 오더(명령)까지 할 수 있어요. 징계심의위원회도 열 수 있고요. 고용을 계속 보장받으려면 원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요.
“1단계 정규직 전환 대상 맞다더니
돌연 부정한 발전 5사”
계측제어 노동자들은 1단계 정규직 전환 대상 노동자다. 정부가 2017년 7월20일 발표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용역계약시 공공기관에서 인건비를 구체적으로 산정하고 채용해야 할 근로자수 등을 정하는 경우”는 1단계 전환 대상으로 분류된다. 발전사들이 용역업체 선정을 위해 작성한 용역설계서에는 ‘엔지니어링 기술자 노임단가’를 기준으로 인건비를 산출했고, 채용해야 할 인력 규모도 정확히 명시했다. 계약의 실질 내용으로 볼 때 전환 대상이 분명했다. 전문가위원도 ‘발전 5사는 계측제어 분야를 1단계 정규직 전환 대상으로 계획했으나 실질적인 논의를 이어 오지 못했다’고 조정안에 명시했다.
하지만 발전 5사는 노·사·전 협의체에서 최근까지 계측제어 노동자가 1단계 전환 예외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전환 예외 이유로는 △민간 고도의 전문성, 시설·장비 활용되는 경우 △법령·정책 등에 의해 중소기업 진흥 장려 직종 △정부정책에 따라 기능조정이 객관적으로 예상되는 경우(석탄화력발전소 폐쇄 같은 산업수요 조정) 등을 들었다. 계측제어 노동자는 황당해했다.
심길섭 : 발전소에 들어와 있는 업체 중 중소기업은 몇 안 돼요. 수산ENS나 우진엔텍 전부 중견기업입니다. 경상정비 사업이 진짜 중소기업을 위한 사업이라면 이런 업체들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 맞는데, 지금 경상정비 업무의 80% 가까이를 맡고 있어요.
박인범 : 용역회사는 근로자 업무능력 향상을 위한 노력을 크게 안 해요. 계약기간 동안 업무를 수행할 뿐이죠. 계약기간 만료되면 정규인력은 고용이 승계되고 사업주가 바뀌고요. 회사가 가지는 독자적인 기술이 아니라 숙련된 노동자들의 정비기술이라는 거죠. 말 그대로 용역회사예요.
실제 발전사가 정비 용역계약 때 사용하는 시방서나 계약특수조건 등을 살펴보면 정비업무에 중요하게 쓰이는 값비싼 특수장비는 발주처가 제공한다. 외주업체는 공구나 휴대용 계측기 등 저가의 정비용 공구 위주로 일부 사용 비용을 부담한다. 기존 업체는 새로운 업체에 정비업무를 인계해 사실상 기술전수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김기왕 : 공기업들은 청년실업률을 낮추겠다는 정부정책에 따라 신입 채용규모를 늘려 고용하면서 왜 계측제어 업무를 하는 사람들은 정규직 전환을 못 한다고 하는 겁니까. 앞으로 사업이 축소될 것이 우려되면 신규채용은 왜 하는지 묻고 싶은 거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도 정부 정책인데 다른 잣대를 가져다 대는 것 아닌가요?
“두 달 남은 논의기간
3~6개월 계약연장에 불안감 고조”
정규직화 논의를 위해 계측제어 노동자에게 남은 기간은 두 달 남짓이다. 경상정비 분야 발전 5사 통합 협의체는 지난 2월22일 중간 합의문을 발표했다. 경상정비 업체 변경시 정규직 고용승계와 계약기간을 현행 3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는 내용을 담은 합의문에는 “계측제어 분야의 정규직 전환 관련 소분과 논의를 재개해 최대 6개월 안에 합의를 추진”하는 취지의 내용이 담겼다. ‘경상정비 계측제어 소분과’ 논의는 합의대로면 8월 중 종료돼야 한다. 남은 기간 동안 발전 5사의 동의와 산업통상자원부 승인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의미다.
심길섭 위원장은 “(직접고용 주체인) 한전KPS는 지난달 25일 열린 10차 소분과 회의에서 ‘국가정책에 충실히 따르겠다는 것이 기본적인 입장으로, 상식선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며 “계측제어 노동자를 직접고용하면 수의계약을 통해 일감을 보장해 달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수용도가 높은 한전KPS에 비해 발전 5사는 의견일치가 완전히 이뤄지지는 않은 상태다. 일부 발전사의 경우 계측제어 노동자를 한전KPS로 재공영화하는 것에 호의적인 의사를 밝혔지만 합의된 상황은 아니다. 노동자들은 정규직화가 간절한 상황이다.
김기왕 : 현재 대부분 사업소는 계약기간이 끝나고 3~6개월 단기 연장계약으로 협의체 논의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직원들의 불안감은 최고조예요.
제정모 : 하동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계측제어 노동자는 현장소장을 제외하고 29명인데, 모두 한전KPS로 가기를 원했어요. 높은 찬성률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최근 전력수급 9차기본계획에서 하동 1~4호기를 2025년까지 운영한다고 발표했거든요. 앞으로 저를 포함한 동료들은 정규직이 안 되면 여기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길어야 4년뿐이에요. 이번에 정규직이 되지 않으면 아마 태반은 나가지 않을까 싶어요.
근로자위원들은 다음 회의 날인 7월22일까지 한전KPS로 전환 채용에 노동자 동의 여부를 조사하기로 했다.
“딴 생각 않고 일하고 싶다”
최장 계약기간이 6년인 터라 받을 수 있는 최대 연차는 17개뿐이다. 모든 복리후생 제도도 바뀌는 업체에 따라 생기고 사라지길 반복된다. 그럼에도 김기왕씨를 포함해 계측제어 노동자 네 명은 적게는 10년, 길게는 20년 넘게 일터를 지켜왔다. 이유는 일에 대한 자긍심 덕분이다.
제정모 : 계측제어 업무라는 게 어떤 사건이 터지면 제일 먼저 와서 분석하고 제일 나중에 가서 결과를 보거든요. 그게 진짜 짜릿해요. 발전소가 멈추면 1만개가 넘는 데이터들을 초 단위·밀리세컨드 단위로 분석하고 왜 기계가 먹통이 됐는지 분석하는 게 우리 일이거든요. 그런 것 한 번 찾으면 한 1년이 뿌듯해요. 발생한 오류가 다른 설비에도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고요.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하는 제씨의 얼굴이 밝다. 그는 “이 일을 하려면 개인적으로 공부해야 할 것도 많다”며 “직원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심길섭 : 처음 입사할 때는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일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어차피 3년 후에 나갈 건데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있나 싶어요. 저도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이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입찰 6개월 앞두고는 내가 이곳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정비를 제대로 하겠어요? 직원들의 바람은 하나예요. 업체가 자꾸 바뀌니까 이 회사, 저 회사 직원들 눈치 보고 딴 생각하는데 그것 안 하는 거예요.
계측제어 노동자 중 발전사가 직접고용한 인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발전 5사는 핵심업무와 비핵심업무를 나눠 남제주·호남·제주화력, 분당·부산·영월·신인천·안동·울산·일산·평택·서인천·인천복합화력 등에서 일하는 계측제어 노동자를 직접고용하고 있다.
김기왕씨는 “전국 각지에서 왔던 노동자들이 일이 싫어서가 아니라 처우를 견딜 수 없으니 떠나간다”며 “핑계는 그만 대고 정규직 전환을 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