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상훈 삼성화재노조 위원장
지난해에는 삼성의 노동역사에 많은 일이 있었다.
삼성화재에는 창업 68년 만에 무노조경영의 틀을 깨고 지난해 2월3일 최초의 진성노조가 설립됐다. 같은해 5월6일 이재용 부회장의 무노조경영에 대한 사과 및 폐기선언이 있었다. 9월1일부터 단체협상에 따라 사무실 지원, 전임자 같은 노조활동이 보장됐다.
하지만 이재용 회장의 무노조 경영에 대한 사과와 폐기선언 5개월 후 새로운 전략이 펼쳐진다.
친사협의회를 노조로 전환해 복수노조로 만들고, 진성노조를 무력화시키라는,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폭로한 ‘S그룹 노조파괴전략’ 문건의 마지막 페이지가 구체적으로 실행되고 있다. 무노조 경영화의 노조파괴 전략 마침표, 화룡정점이 드디어 실행된 것이다.
삼성화재를 시작으로 전 계열사 확산이 예고됐다. 그래서 민주노총·한국노총 내 대부분 계열사의 진성노조가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역 삼성화재 본관 앞에서 열린 어용노조설립 규탄 대회에 모여서 한목소리를 냈다.
삼성화재 전례로 볼 때, 지금 막지 못하면 이 전략은 영구히 실행되고 강화할 것이다. 삼성은 노동자 착취를 활용한 미래 먹거리를 만들고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삼성의 이중적인 모습이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 감형을 위해 겉으로는 무노조경영 폐기 선언 후 수면 아래로 진성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어용노조 설립을 추진했고 결국 지난 7일 설립신고증을 받았다.
과거 삼성화재 무노조 경영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68년 동안 노조가 없었다. 다만 34년 전인 1987년 노동자들의 불만과 분노가 폭발해서 노조설립을 시도했지만, 이마저도 사측의 방해로 무산됐다. 노조설립을 위해 한국노총을 찾아간 노동자 모두가 사측에 의해 끌려 나왔기 때문이다.
이후 사측이 직원 상조회(평사원협의회)를 만들어 준 후, 상조회는 근로조건협약·임금협약 등을 노조설립 전까지 진행해 왔다. 상조회장은 거의 전원 부서장으로 발탁하고, 상무급 이상 임원을 다수 핵심 간부로 임명해 다양한 특혜를 부여했다. 이들을 통해 전체 노동자들을 관리·통제하고 억압해 왔다.
젊은 노동자들에겐 34년간 평사원협의회 간부가 되는 것은 출세의 지름길로 인식됐다. 특히 경력이 짧고, 꿈을 가진 직원들이 선호하는 출세코스였다. 사적모임이 금지돼 있는 사규에도 회장들은 매년 정기모임을 했다. 선후배 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장과 인사팀·임원들의 비호 아래 전두환 군부의 하나회 같은 존재로 34년간 그 지위와 세력을 공공연하게 유지해 왔다.
34년이 지난 지금 평사원협의회는 전체 직원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일부 간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삼성화재노조가 지난해 설립되자, 평사원협의회는 법적 한계를 깨달았다. 34년 만에 전직 부회장이 노조설립 추진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당선된 후, 신고증을 받았다. 회사의 노사팀 역할을 해 온 사측의 실질적 산하조직이, 그 실체는 그대로 유지한 채 껍데기만 노조로 전환하는 신분세탁을 했다. 회사의 개입은 전혀 없었다고 얘기하면서 고용노동부의 협조 아래 설립신고증을 받은 것이다.
정확히 34년 전 진성노조 설립을 막았던 그 사태와 어쩌면 이리 같은지 놀라울 지경이다. 현 사태를 바라보며 일부 언론은 노노갈등으로 바라본다. 잘못된 분석이고 본질을 왜곡한 것이다. 노노갈등이 아니라, 노사갈등이다. 평협노조는 자주적·민주적 노조가 아닌 사측이 만든 어용노조다.
삼성화재노조는 계속 그래 왔던 것처럼 평협노조에 연대를 제안하고 지켜볼 것이다. 이를 거부한다면 분명 사측이다. 회사가 어용노조를 만든 덕분에, 기존 노조와 회사 간 갈등의 골이 깊고 심각해져 가고 있다. 노동자 간 갈등이 아니다.
표면적인 갈등구조를 만든 것도 회사고, 새로운 노조를 만든 주체도 회사다. 이젠 그 속을 다 안다. 두 번 속지 않는다. 사측이 어용노조 설립을 통해 노사갈등을 노노갈등으로 만들었고, 회사가 뒤로 빠지는 이이제이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필자는 1년 동안 삼성에서 노조를 이끌면서 노동부를 드나들 때마다, 대한민국 제1 경제권력 삼성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노동부는 삼성 앞에서 순한 양이 된다. 노동부가 아닌 삼성 기업부다.
노동부 일부 공무원들은 삼성에 인맥을 만들려 하고 있다. 삼성화재 사측이 전화하면 사측에 고용된 노무사보다도 더 친절하게 받는다. 정부는 삼성의 부당노동행위를 막기 위해 근로감독을 철저히 하고,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개정해야 한다.
역사는 진실의 껍질을 벗길 것이다. 우리는 라임사태를 기억한다.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은행들이 대놓고 고객을 상대로 사기쳤다. 감독기관의 무분별한 인가와 감독 소홀로 인해 대형금융사기로 번진 것이다. 삼성화재의 어용노조 설립은 노동부의 동의 아래 진행된, 라임사태에 버금가는 희대의 노동사기극이다.
삼성화재노조는 낮은 곳에서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설움을 함께하는 노조다. 최저임금 받는 무기계약직들의 방패막이가 돼 주고 있고, 특수고용직 설계사 2만3천명 중 수천명이 가입해 있다. 고용이 불안정하거나, 저소득인 노동자들의 삶을 지켜 주는 노조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삼성 노동자 입장에서 볼 때 노조는 두 개의 부류밖에 없다.
진성노조냐, 아니면 어용노조냐. 삼성에서 어용노조를 설립하거나 가입한 부모는 자식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한다. 진성노조는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줄 사회적 자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