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2월26일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29호·87호·98호 비준동의안을 의결했다. 지난달 20일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서 화상으로 ILO 가이 라이더 사무총장에게 3개 협약에 대한 비준서를 기탁했다. ‘기탁(寄託)’은 다수국 간의 조약을 국제법에서 성립시키기 위해 비준서를 일정한 곳에 보낸다는 뜻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29호 강제노동 협약, 87호 결사의 자유 협약, 98호 단체교섭권 협약에 대한 비준을 마치게 됐고, ILO에 가입한 지 30년 만에 8개 기본협약 중 7개를 비준한 나라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게 됐다. 이들 협약은 기탁일부터 1년이 지나는 내년 4월20일부터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문재인 정권에서 29호·87호·98호에 대한 비준 노력을 기울이기 전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기본협약은 아동노동 관련 138호와 182호, 차별금지 관련 100호와 111호 등 4개에 불과했다. 이들 4개 기본협약에 대한 비준은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 때 이뤄졌다.
ILO는 1919년 가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하루 8시간과 주 48시간을 규정한 ‘일의 시간(hour of work)’에 관한 1호 협약을 채택한 이래 지난 100년 동안 노·사·정 3자 합의를 통해 모두 190개 협약을 만들었다. 이들 190개 협약은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기본협약(Fundamental Conventions, 8개), 우선협약[Governance (Priority) Conventions, 4개], 기술협약(Technical Conventions, 178개)이 그것이다. 29호·87호·98호 협약에 대한 국회의 비준동의안이 의결됨으로써 전체 190개 협약 중에서는 기존 29개에서 3개를 더해 모두 32개를 비준하게 됐다. 기본협약 8개 중 7개, 정부의 노동행정 관련 우선협약 4개 중 3개, 기술협약 178개 중 22개를 비준한 것이다.
이번에 29호·87호·98호 등 기본협약 3개가 비준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나, 이것으로 국제노동기준인 ILO 협약 문제가 일단락된 것은 아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번 비준은 ILO 협약 비준 캠페인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ILO 협약과 관련해 앞으로 본격적으로 풀어나갈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첫째, 8개 기본협약의 하나로 ‘강제노동 금지’를 규제하는 105호 비준 문제가 남아 있다. “현존하는 정치체제·사회체제·경제체제에 반대하는 정치적 견해 또는 사상적 견해를 표현하는 행위와 파업 참가를 처벌하는 수단”으로 강제노동을 악용하면 안 된다는 내용의 105호를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ILO 187개 회원국 중 11개에 불과하다(한국·브루나이·중국·일본·라오스·마셜제도·미얀마·팔라우·동티모르·통가·투발루).
105호는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 안건으로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헌법 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돼 있다. 헌법 22조는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돼 있다. 이미 우리 헌법에는 협약 105호 정신이 반영돼 있다. 105호 협약에 대한 무관심은 홍콩의 국가보안법 문제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한국의 국가보안법 문제에는 둔감한 국내 분위기와도 연결돼 있다.
노동권 측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105호 협약이 파업 참가자에 대한 형사 처벌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은 형법 314조의 업무방해죄를 악용해 파업 참가자를 처벌하는 나라다. 민주주의를 한다는 나라들에서 파업 참가자 형사 처벌은 19세기 말과 20세 초를 거치며 사라졌다.
둘째, 회원국 정부가 노동행정 및 정책에서 우선적으로 처리할 과제를 규정하고 있는 우선협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선협약 4개 중에서 우리 정부가 비준한 것은 노동(근로)감독 81호, 고용정책 122호, 3자 협의 144호, 3개다. 우리 정부는 농업에 대한 노동감독을 규정한 129호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이 문제는 농업을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많은 현실은 5명 미만 사업장 문제임과 동시에 농업과 어업 같은 업종 문제이기도 하다. 이주노동자 없이 버티기 힘든 농업의 현실을 고려할 때 129호 비준은 노동시장의 맨 밑바닥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주노동자를 공평하게 대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셋째, 이미 비준된 협약들의 내용이 법령에 제대로 반영돼 있는지, 또한 제도로 만들어져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비준(ratification)은 법령과 정책과 관행을 해당 협약에 맞게 뜯어고치겠다는 정치적 약속이다. 법과 제도에서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꼼꼼히 따져봐야 할 대표적인 협약들로는 19호(산재보상에서 외국인 균등처우), 47호(주 40시간), 100호(동등 보수), 111호(고용과 직업에 따른 차별), 139호(직업성 암), 155호(직업안전보건), 170호(화학물질), 182호(최악의 아동노동) 등을 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ILO 협약의 대다수를 이루는 기술협약을 비준하는 캠페인을 해야 한다. 노동자가 생애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의 세계(the world of work)’에서 일어나는 핵심 문제들인 근무시간·고용·직업훈련·임금·안전보건·사회보장·이주·모성보호와 관련된 협약들은 모두 기술협약으로 분류된다. 사회보장과 사회정책에서 ILO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협약이 10개를 넘지만 우리 정부가 비준한 협약은 단 하나도 없다. 일하는 사람들의 복지가 엉망인 이유를 설명하는 하나의 지표다. 또한 간호인을 위한 근무환경의 표준화를 강조하는 149호와 재택근무의 조건을 설명하고 있는 177호는 코로나19 전염병 상황에서 정부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아 준다. 이런 점에서 기술협약들이야말로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겪는 실질적인 문제들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핵심협약(core convention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