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2018년 추진한 표준임금체계는 저임금 직무급제의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였다. 노동계 반발로 철회됐지만 저임금 기조는 공공기관 자회사와 공무직 임금체계 구성에 영향을 줬다.
① 직무급제 ‘동상이몽’
② 실체 없는 정부의 직무급제, 외국은
③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위한 변화들
직무급제는 일한 기간을 따지는 연공성과 일의 성과를 평가하는 성과급보다 하는 일의 어려움과 역할을 따져 임금을 책정하는 방식이다. 고령인구 증가와 출산률 하락으로 인한 인구구조 변화, IT기술의 빠른 진보로 숙련기술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워지는 노동시장 변화와 노동시장 양극화를 심화했다는 연공급제 비판이 겹치면서 임금체계 대안으로 떠올랐다. 노정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직무급제 도입을 놓고 사회적 대화를 시작한다. <매일노동뉴스>가 직무급제를 둘러싼 논란과 도입을 위해 필요한 조건을 짚어봤다.<편집자>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부문 직무급제의 원형은 2018년 시도했다가 좌초한 표준임금체계에서 엿볼 수 있다.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정책으로 기간제·간접고용 노동자가 대거 정규직화하면서 이들을 기존 공공부문 호봉제에 편입하면 막대한 재정부담이 생길 것이란 우려가 컸다. 이 때문에 청소·경비·시설관리·조리·사무보조 5개 주요 전환직종을 대상으로 직무급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표준임금체계, 저임금 직무급제 고착화
“직무급제 강조하는 정부, 정작 내용은 없다”
표준임금체계는 청소를 일반청소와 전문청소로, 경비를 시설경비와 전문경비로 나누는 것처럼 5개 직종에 각각 2개 이상의 직무를 세분화했다. 일반청소는 건물 내외부의 단순하고 전형적인 청소를, 전문청소는 지식·기술을 요구하는 병원청소원과 도로정비 같은 세부직무를 의미한다.
이렇게 구성한 직무 간 상대가치를 산출해 등급을 매긴다. 일반청소는 1등급, 전문청소는 2등급이다. 모든 직무가 1등급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조리직종은 2등급부터 시작한다. 조리원은 2등급, 조리사는 3등급이다.
연공성도 일부 반영한다. 표준임금체계는 숙련도에 따라 단계를 승급한다. 일반청소 직무를 2년 이상 하면 숙련도를 인정해 1단계에서 2단계로 오르고, 임금을 인상한다.
여기에 고용노동부가 2019년 직무중심 인사관리 따라잡기에서 제시한 원칙을 들여다보면 정부의 직무급제 원형이 나온다. 정리하면 △수당구조 단순화 △상여금 실질화 △근로시간체계 개선 △노사 간 공감대다. 직무 난이도를 기반으로 임금을 차등하고, 근속기간에 따른 단계 승급을 단순화해 연공성을 일부 반영하는 것이다.
표준임금체계는 자리 잡지 못했다. 정부가 1등급 1단계 임금수준을 최저임금에 맞췄기 때문이다. 저임금 직무급제라는 비판에 정부는 뒤늦게 기준을 삭제했지만 좌초를 막지 못했다. 표준임금체계는 폐기됐지만 저임금 직무급제는 확산했다. 다양한 공공기관이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직무급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요금수납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한 한국도로공사서비스도 직무급제를 도입했다. 이대한 한국도로공사서비스노조 위원장은 “요금수납원 등급을 3개로 나누고, 단계도 5단계로 설정한 직무급제”라며 “임금은 용역 당시보다 올랐지만 한국도로공사와 비교하면 여전히 50%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런 직무급제를 기반으로 한 임금 테이블도 3개나 된다. 콜센터 노동자와 교통방송센터 노동자는 업무가 상이해 별도 직무급제 테이블을 만든 것이다. 이대한 위원장은 “도로공사 시설 관련 자회사는 경비·미화·조경·관리 등 직무마다 아예 다른 임금테이블을 마련했다”며 “물론 임금수준은 높지 않다”고 말했다.
표준임금체계 폐기 이후 정부가 내놓은 공공부문 직무급제 표준안은 없다. 이 때문에 기관마다 별도로 여건에 따라 도입하면서 형태도, 임금수준도 천차만별이다. 이승협 대구대 교수(사회학)는 “정부가 표준임금체계를 논의하면서 ‘저임금 직무급제’라는 인식을 각인시켰다”며 “독일은 저숙련 노동자에게 임금을 기존보다 많이 주고, 대신 임금인상을 완만하게 하는 방식으로 수용성을 높였는데, 우리나라는 완만한 임금인상 구조는 차용하면서 수준은 최저임금에 기반해 반발을 자초했다”고 설명했다.
독일·영국 ‘직무중심’ 역사적 경험
유럽·일본 공통점 “연공성 배제 안 해”
그렇다면 직무급제 도입에 성공한 나라들은 어떨까. 독일의 직무급제는 산별직무에 기반한 임금체계다. 산별단체협약으로 임금구조와 임금수준을 결정하는데, 개별 사업장은 사후조정이 불가능하다. 산별노조 대표와 정부 대표가 직접 교섭을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관별 혹은 고용형태별 임금격차가 드러나지 않는다.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표현 그대로 이행하는 방식이다.
독일은 직무를 E1~15등급으로, 숙련도를 6단계로 구분한다. 표준임금체계처럼 모든 직무가 15등급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일부 등급구간의 적용을 받는다. 근속에 따라 숙련이 향상한다는 전제 아래 단계마다 자동적으로 임금을 올린다.
이승협 교수는 “유럽은 역사적으로 직무 중심의 노동 시스템이 정착했고 독일도 마찬가지”라며 “임금체계가 직장이 아니라 일을 중심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어 직무급제 정착이 상대적으로 용이했다”고 풀이했다.
공공부문 직무급제 도입의 직접적 계기는 2001년 5개 독일노총 아래 5개 산별노조가 통합해 통합서비스노조를 만들고 사무직과 기능기술직을 통합한 새 임금체계를 만드는 교섭을 시작하면서다.
영국도 이와 유사하다. 공공부문 기본급을 업무 난이도와 중요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조직 내 직종이나 고용형태에 따른 차별 없이 하나의 임금테이블에 포괄한다. 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와 간접고용 노동자 임금테이블이 같다.
영국의 직무급제는 다소 복잡하다. 우선 6~49개의 임금포인트를 정해 뒀다. 2017년 기준 6포인트는 시간당 7.78파운드(1만1천952원)다. 49포인트는 22.71파운드(3만4천890원)다. 영국의 각 지방정부는 이해당사자와 협의해 등급을 설정하고, 등급에 따른 직무분석을 통해 이 포인트를 배분한다. 1등급은 생활임금을, 2등급은 11포인트를, 3등급은 12포인트를 배정하는 방식이다. 등급 내에서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승급하는데, 승급은 근속에 따른다.
채준호 전북대 교수(경영학)는 “영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기관 간은 물론이고 기관 내 임금테이블도 매우 다양하다”며 “영국은 이런 임금테이블을 단일화하고 직무를 중심으로 임금차별을 줄이기 위해 장기간의 논의를 거쳤다”고 전했다.
우리나라와 유사하다는 일본은 어떨까. 호봉제에 익숙한 일본은 독립행정법인을 둬 우리나라 공공기관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독립행정법인의 직급은 통상 10급이다. 일본도 직무급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자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상은 역할급이라는 다소 생소한 체계를 도입했다. 직무에 따른 등급이 아닌 역할에 대한 등급을 정한 체계다.
박우성 경희대 교수(경영학)는 “일본도 직무급을 도입했지만 연공급과 큰 차이가 없게 운용돼 타협안으로 역할급을 택한 것”이라며 “직급에 따른 역할을 묶어 해당 직급 내에서는 연공성의 차이를 크게 두지 않고 역할에 따른 임금 동질성을 유지하려는 체계”라고 밝혔다. 박우성 교수는 “어느 임금체계이건 연공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정부, 기관 정규직 간 임금격차 해소만 얘기”
직무급 찬성쪽도 “중앙교섭채널 확립 필요” 강조
외국 사례를 종합한 직무급제의 특징은 노정교섭과 임금차별 축소를 위한 노력으로 요약된다. 독일과 영국처럼 이미 직무 중심의 경제가 정착한 곳은 특히 중앙교섭채널을 통해 기관과 고용형태별 임금차별을 해소하는 데 중점을 뒀다. 이것이 정부 직무급제 도입 방식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채준호 교수는 “정부는 같은 기관 내 정규직의 근속에 따른 임금격차만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가져와 비판할 뿐 공무직이나 다른 기관과의 격차는 말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물론 이는 학계의 통일된 시각은 아니다. 박지순 고려대 교수(법학)는 “지금 임금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당위는 공공기관 방만경영 때문”이라며 “경직된 연공서열 때문에 임금비용은 높고 결과적으로 신규 채용에도 장애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연공급제가 이런 문제를 불러온 원인은 아닐지라도 양극화 문제를 유지하고 가속화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계도 연공서열제를 마냥 유지하자고는 못하지만 성과측정과 직무분석 등을 이야기하며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며 “모든 것을 갖춰 놓고 시작하면 좋겠지만 몇 년간 사회에서 이런 문제가 제기돼 왔으니 미루고만 있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공감대를 형성하는 부분도 있다. 바로 논의구조다. 박지순 교수는 “임금체계 개편을 위해 정부도 노동계를 파트너로 인정하고 교섭방식을 새로 구축해야 한다”며 “외국의 직무급제 도입이 권위 있는 중앙교섭을 통해 이뤄지고 있는데, 지금 정부의 방식은 그런 부분을 외면한 것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