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노동기구(ILO) 홈페이지 갈무리
국제노동기구(ILO)의 ‘협약 및 권고 적용 전문가위원회’가 올해 6월 열리는 국제노동회의(International Labour Conference, ILO 연차 총회)에 제출할 <2021년 국제노동기준 적용> 보고서를 지난 15일 냈다. 여기서 국제노동기준은 ILO가 채택한 협약과 권고를 말하며, 특정 회원국들을 대상으로 협약과 권고의 이행 상황을 점검한 내용이 보고서에 담겼다.
한국과 관련해서는 100호 동등 보수 협약(1951년 채택), 111호 고용과 직업에서의 차별 협약(1958년 채택), 156호 가족을 책임진 노동자 협약(1981년 채택)이 다뤄졌다. ILO 전문가위원회는 2019년과 지난해에 걸쳐 한국 정부 보고서와 경총 보고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국 관련 입장을 정리했다. 위원회는 한국에서 남녀 임금격차가 지속하고 있으며, 그 금액의 차이도 크다면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과 관련 시행령 등이 남녀 동등 보수를 규정한 100호에 충분하게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전문가위는 한국 대법원의 2019년 3월14일 판결도 언급하고 있다. 이 판결은 대학이 시간강사에게 ‘전업·비전업 확인서’를 제출하게 해 강사료를 차등 지급한 것이 근로기준법 6조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해 남녀의 성(性)을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하지 못하고, 국적·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한다’와 남녀고용평등법 8조1항 ‘동일한 사업 내의 동일 가치의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한 임금을 지급한다’는 조항에 위배된다는 내용이다. 전문가위는 대법원 판결을 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동등한 가치의 일(the work of equal value)’과 ‘동등한 일(equal work)’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한계가 있다고 평가했다. ILO 협약에는 ‘동일노동(equal labour)’이란 말은 없다. ‘동등한 가치의 일(work of equal value)’로 돼 있다.
전문가위는 100호 협약 1조가 의미하는 바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가치의 일’을 했다면 급여도 동등해야 한다는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이는 “동일한 사업이나 동일한 사업체”의 범위를 넘어 실행돼야 하는 원칙이라고 밝혔다. 다시 말해 남녀고용평등법 8조1항에 있는 “동일한 사업 내”라는 제한이 100호 협약의 내용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ILO의 지적은 국내 일부 논자들의 직무급제 도입 주장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여진다. 국가와 자본이 결탁해 임금 결정을 “동일한 사업 내” 혹은 “동일한 사업체 내”로 억제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직무급 도입은 기업 간 임금 격차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또한 ILO 전문가위는 한국 정부가 학교 밖에서 이뤄지는 초·중·고 교사들의 정당 가입과 선거운동 참여 같은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것이 고용과 직업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 111호 협약에 위배된다고 봤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정치 활동을 억압하는 한국 정부의 조치는 협약 111호가 규정한 인종·피부색·성·종교, 정치적 견해, 국적 혹은 사회적 출신에 따른 차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활동 제한은 공공부문 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공무에 한정돼야 한다고 ILO 전문가위는 강조했다.
156호 협약과 관련해 ILO 전문가위는 남녀고용평등법 적용 대상이 5명 이상 사업체에서 모든 사업체로 확대된 것과 배우자 출산 휴가로 인한 남편의 휴가 기간이 5일에서 10일로 늘어난 것을 긍정적으로 봤다. 특히 한국 정부의 ‘3차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 촉진 기본계획(2020∼2024)’에 대해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ILO 전문가위는 한국 정부가 가족을 책임지는 남녀 노동자들이 고용상 평등한 기회와 처우를 받을 수 있도록 구체적 조치를 취할 것과 더불어 이러한 가족 친화적 조치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가족돌봄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유의할 것을 권고했다. 한국 정부는 1997년 100호 협약, 1998년 111호 협약, 2001년 156호 협약을 비준했다.
<2021년 국제노동기준 적용> 보고서는 ILO 협약 비준과 관련된 한국 정부의 입장인 ‘선 입법-후 비준’이 어불성설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국내 입법이 ILO 협약의 조항들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국회 동의 절차 없이 관료가 주도한 국무회의 결정만으로 비준이 강행됐음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한국 정부가 비준한 29개 협약 중에 ‘선 입법’ 과정을 제대로 거쳐 비준된 협약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비준한 ILO 협약의 조항들과 충돌하는 국내 법령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정치적 행위인 비준 결정이 ‘선 입법’을 빙자한 관료들의 사보타지로 뭉개지는 일이 없도록 정치권과 노동계는 각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