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갑질119와 김영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최로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계약갑질 제보 전수조사 분석 발표회
2015년부터 아동발달센터에서 언어치료사로 일한 이산홍(49)씨는 지난해 퇴사 과정에서 크게 상심했다. 7년 동안 아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크게 보람을 느꼈던 이씨지만 재작년 여름 한 아이의 발길질에 늑골을 다치게 됐다. 이씨는 출근하지 못한 기간 동안에 수당 한 푼 받지 못했다. 원장은 개인적으로 100만원의 위로금을 지급했고, 병가 중 추석이 찾아오자 30만원이던 상여금을 절반만 지급했다. 이씨는 “7년간 열심히 일한 직장에 대해 허무함을 느꼈고 자존심이 상하는” 경험을 했다. 이후 이씨는 퇴사를 결심했고 이씨는 퇴직금을 요구했다. 하지만 원장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프리랜서라 퇴직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 수많은 업무지시로 스스로를 프리랜서라고 여긴 적 없는 이씨였다. 하지만 입사 후 2년이 지나서야 쓰게 된 ‘인적용역 계약서’가 프리랜서 계약의 근거라고 원장은 주장했다. 이씨는 이후 퇴직금을 받기 위해 고용노동부 경기지청에 임금체불 진정을 제기했지만 ‘혐의없음’으로 사건은 종결됐다. 이씨는 “열악한 언어치료사들에게 좋은 선례를 남기기 위해 민사소송까지 결심했다”며 “사용자에게 면죄부를 주지 않도록 정부와 근로감독관이 적극적인 감독을 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글씨가 작아 보이지 않는 근로계약서 나오기도
10일이면 근로기준법 제정 70주년을 맞지만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못한 노동자가 ‘계약갑질’을 경험한 노동자 2명 중 1명꼴인 것으로 드러났다.
직장갑질119는 8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 2간담회실에서 근로기준법 제정 70주년을 맞아 근로계약에서 갑질을 경험한 사례를 공개했다. 2020년 3월부터 3년간 직장갑질119가 수합한 637건의 계약갑질 이메일 제보 중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거나 교부받지 못한 사례가 44.1%(중복집계)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노동관계법률을 위반한 조항이 들어간 계약서 유형이 30%, 채용 뒤 노동조건을 바꾸거나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등의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채용절차법)을 위반한 유형은 21.7%다. 특수고용직인데 프리랜서 계약을 한 사례도 20.1%나 됐다.
근로기준법 17조는 사용자가 노동조건이 명시된 근로계약서를 계약 당사자인 근로자에게 교부하도록 돼 있다. 이를 위반하면 사업주는 최대 500만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 하지만 직장갑질119에는 ‘글씨를 작게 만들어 근로계약을 볼 수 없는 근로계약서’나 ‘서식이 없다며 근로계약서를 작성을 거부한’ 사례들이 제보됐다. 이산홍씨 사례처럼 실질적 근로형태가 노동자에 해당하지만 위탁, 도급, 위임, 프리랜서 등 다양한 계약서를 강요받는 ‘위장 프리랜서’사례도 대표적 계약갑질로 꼽힌다.
김기홍 공인노무사(직장갑질119)는 “위장 프리랜서는 근로시간, 휴가, 휴일, 직장내 괴롭힘, 성희롱 예방조치 등 노동자라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며 “위장 프리랜서 사용이 빈번한 업종이나 반복적으로 문제가 된 사업장은 노동부가 적극적으로 근로감독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법 사각지대, 빈곤에 놓인 프리랜서
“적극적 노동행정, 강한 사용자 제재 필요”
이날 소개된 계약갑질 유형 가운데 ‘위장 프리랜서’문제는 앞으로도 더욱 커질 전망이다. 지난해 강금봉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전문위원이 발표한 ‘프리랜서의 소득 불안정에 대한 동태적 실증 연구’에 따르면 프리랜서 일자리는 플랫폼 경제의 부상 등 다양한 이유를 배경으로 증가해 왔다. 연구에 따르면 프리랜서는 최하위 소득그룹에 속하는 비율이 높았고 임금근로자에 비해 지속적으로 저소득에 머물 확률이 높았다.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위치할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셈이다.
직장갑질119는 이같은 ‘위장 프리랜서’문제에서 노동자들이 불리한 노동조건을 더 이상 강요당하지 않도록 법·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유경 공인노무사(직장갑질119)는 “계약서 미작성에 대한 처벌이 벌금 500만원 이하로 미미한 수준이고 일부 업종에서 정부가 마련하는 표준계약서는 현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사례가 다수”라며 “궁극적으로는 사용자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근로계약서 작성을 하도록 법과 제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 노무사는 “우리 현행 법과 판례는 노동자가 근로자성을 입증하기 위해 근거 자료를 확보해야 하는데 매우 까다로운데다가 쉽게 근로자 지위가 부정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며 “근로자 지위에 대한 입증 책임을 사용자에 부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직장갑질119는 이처럼 노동관계법령을 준수하지 않은 근로계약서 사례를 30개 꼽아 11일부터 12일까지 의원회관 3전시실에서 전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