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가스공사 유튜브 홍보영상 갈무리
한국가스공사 직원이 27년 만에 새로운 업무를 맡은 뒤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뇌출혈로 숨진 것은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사무업무만 하다가 무더운 자재창고에서 무거운 비품을 나르며 쌓인 과로와 스트레스가 영향을 줬다는 취지다.
감사 지적에 ‘우수사업소 벤치마킹’ 노력
뜨거운 자재창고 머물며 무거운 비품 운반
15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8부(재판장 이정희 부장판사)는 가스공사 직원 A(사망 당시 54세)씨의 아내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취소 소송에서 최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1992년 공사에 입사한 A씨는 주로 경영평가·기획 등 업무를 맡았다. 그런데 27년이 흐른 2019년 7월께 자재·비품 관리자가 징계를 받자 처음으로 자재·비품 구매·관리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곧바로 업무미숙이 적발됐다. 이듬해 5월 본사의 재물조사 현상실사 과정에서 자재관리가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지적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같은해 7월께 또다시 자재창고를 정비할 것을 권고받았다.
A씨는 즉시 자재창고 정비 일정 마련에 나섰지만, 마지막 근무가 되고 말았다. 2020년 7월20일 ‘우수사업소 벤치마킹’을 위해 경기지역본부에 방문했다가 자재창고 사무실에서 쓰러진 것이다. 즉시 병원에 이송됐지만, 6일 만에 지주막하 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A씨 아내는 “새 업무에 관한 감사로 정신적 스트레스와 업무 부담이 급격히 증가했다”며 업무상 재해를 주장했지만, 공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업무와 상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가 없다는 이유다. 유족은 2021년 8월 공단 처분에 불복해 소송을 냈다.
공단 ‘컴퓨터 로그인’ 업무시간 계산
법원 “실제 시간 길고, 육체적 피로 높아”
법원은 공단 판정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업무 감사 과정에서 A씨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공단이 계산한 업무시간도 정확하지 않다고 봤다. 재판부는 “공단은 업무시간을 사무실 컴퓨터 로그인 기록과 시간외근무 신청내역만을 토대로 산정해 자재창고 근무시간 등은 반영되지 않았다”며 “A씨가 오전 8시 이전에 출근해 업무를 하는 경우도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하면 실제 업무시간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공단은 발병 전 1·4·12주 동안의 주당 평균 업무시간을 각각 45시간14분, 51시간2분, 43시간20분으로 계산했다. 고용노동부 고시인 ‘뇌심혈관 질병의 업무 관련성 인정기준’에서 과로로 인정하는 12주간 1주 평균 60시간과 4주간 1주 평균 64시간 근무에 미치지 못한다.
‘업무부담 가중요인’도 업무상 재해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자재창고는 냉난방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 외부 온도변화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A씨는)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 상시착용 상태로 근무해 육체적 피로도가 더욱 컸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야적장의 자재를 직접 운반해 육체적 강도 역시 높았다고 봤다. 노동부 고시가 정한 ‘유해한 작업환경(온도변화)’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A씨에게 고혈압 의심 증상이 있었던 부분도 “업무상 스트레스가 없다면 혈압만으로 뇌출혈이 발병했을 가능성은 적다”는 법원 감정의(직업환경의학과) 소견을 토대로 자연 경과 이상으로 사망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의학적 견해를 뒤집을 뚜렷한 사정도 보이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유족측을 대리한 김용준·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망인은 20년 가까이 사무직에서만 일했는데, 갑자기 창고관리를 하면서 무거운 비품을 운반하는 작업을 하던 중 사고를 당했다”며 “기저질환이 있고 공단이 측정한 업무시간이 52시간에 미달하더라도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있다면 업무상 재해가 인정된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