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노조 정보통신유지관리지부


설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 9일 한국도로공사는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차량이 하이패스 차로만 이용하도록 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지난달 29일 요금수납 업무를 담당하는 자회사인 한국도로공사서비스㈜와 요금수납원들이 임금·단체협약을 체결하지 못해 노동자들이 10일 오후 6시부터 파업하겠다고 예고했기 때문이다. 한국도로공사서비스노조는 8일 87.15%의 높은 지지를 받아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9일 밤 10시께 가까스로 교섭을 타결하면서 노조는 파업을 철회했다.

법원 “구속력 있는 지휘·명령, 하나의 작업집단” 인정

이 국면에서 하이패스 차로의 유지관리와 고장수리업무를 담당하는 기술자들이 용역노동자라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도로공사의 지능형 교통체계(ITS) 유지관리·고장수리업무를 담당하는 기술자는 당초 도로공사가 설립한 고속도로정보통신공단 소속 노동자였다. 도로공사가 2002년 경영 효율화를 명분으로 공단을 민영화하면서 용역노동자로 전락했다. 이를 부당하게 여긴 노동자 93명이 2018년 5월31일 소송을 제기했다.

대구지법 김천지원은 지난 5일 도로공사에 이들을 직접고용하라고 판결했다. 김천지원은 “도로공사는 ITS 용역노동자에게 업무수행 자체에 관한 구속력 있는 지시를 하는 등 상당한 지휘·명령을 했다”며 “용역노동자가 도로공사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됐다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번 판결에 따라 이들은 도로공사에 직접고용을 요구할 계획이다.

그러나 법정공방이 1심 판결로 끝날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 도로공사는 이번 판결과 유사한 요금수납원·안전순찰원·상황보조원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대법원까지 끌고 갔다.

요금수납 비롯 안전순찰·고속도로 모니터링 모두 송사

2013년 2월8일 시작한 안전순찰원 소송은 앞선 ITS 기술자 소송과 유사하다. 안전순찰원 업무도 애초 도로공사 업무였다. 도로공사는 2007년 안전순찰 업무를 외주화하기 시작했다. 2011년께 전국 지사 안전순찰 업무의 70%가 외주화됐다.

겉만 외주화였다. 도로공사는 이번에도 노동자를 직접 지휘했다. 도로공사는 차량위치확인 시스템을 통해 용역 안전순찰원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작업장소와 내용을 통제했다. 용역 안전순찰원은 순찰일지를 도로공사에 제출해야 했다. 1심과 2심은 모두 이를 직접적인 지휘·감독으로 보고 직접고용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도 원심을 유지했다.

대법원은 지난해 5월 “도로공사가 용역 안전순찰원의 작업량·작업방법·작업순서·작업속도·작업장소·작업시간을 결정하거나 지시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며 “도로공사가 오랫동안 직접 처리했던 고속도로 순찰업무를 인위적으로 외주화한 점, 하나의 망으로 연결된 고속도로를 유지·관리·순찰하는 업무는 긴급성과 신속성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점 등 안전순찰원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 도로공사의 지휘·명령이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안전순찰업무가 사실상 도로공사의 직접 개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본 셈이다. 첫 소송부터 대법원 판결까지 7년여를 끌었지만, 이사이 법원이 도로공사의 주장을 인용한 것은 2심 재판부가 손해배상액 일부를 경감한 때뿐이다. 대법원은 도로공사의 상고 이유 모두를 기각했다.

‘경비용역’ 체결하고 ‘상황실 근무’ 맡긴 도로공사

이런 상황은 2013년 12월6일 시작한 상황보조원 소송에서도 되풀이됐다. 고속도로 상황실 보조근무를 하던 노동자는 용역업체 대표라는 외피를 썼다. 개인사업자였던 것이다.

노동자 A·B씨는 각각 2007년, 2011년부터 도로공사와 용역계약을 맺고 직접 근무를 했다. 도로공사는 이후 이들과 용역계약 갱신절차 없이 계약을 유지했다. 그러다 이들이 2013년 12월6일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하자 같은해 12월24일 용역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법원은 부당해고라고 판결했다. 용역계약이라는 형식보다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았다는 근로의 실질이 더 중요하다고 일관되게 판결했다.

이들이 도로공사와 체결한 용역은 경비용역이다. 실제로는 민원전화 응대와 교통사고·고장차량·낙하물로 인한 교통장애 발생시 안전순찰원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는 일 등을 더 많이 했다. 경비업무는 상황실 보조근무 중간 4회에 걸쳐 시설물 순찰·점검을 하는 수준으로만 이뤄졌다.

1심 재판을 맡은 수원지법 성남지원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지는 계약의 형식보다 실질에 있어 근로자가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했는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며 “상황보조원은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 관계에서 도로공사에 근로를 제공한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이어 “상황실 보조근무는 도로의 유지·관리에 관한 업무를 주업무로 하는 도로공사에서 중요한 업무”라며 “상황보조원이 도로공사의 지사 상황실에서 업무를 하면서 작성한 교통상황 및 근무일지를 통해 (도로공사가) 상당한 지휘·감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이후 서울고법은 도로공사의 손을 들어 손해배상액 일부를 경감했지만, 지휘·감독에 대해서는 훨씬 구제척으로 판결했다. 도로공사는 서울고법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패소했다. 대법원은 상고 이유가 없다고 보고 2018년 2월8일 심리불속행 기각했다.

“도로공사, 항소 포기하고 고용안정에 힘써야”

법원의 일관된 판결에도 도로공사는 여전히 용역·비정규직 문제에 휩싸여 있다. 고용형태를 놓고 보면 도로공사는 용역노동과 비정규직을 막힘 없이 채용했다. 도로공사 임직원 현황을 보면 이런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난해 4분기 기준 도로공사 정규직은 8천464명이다. 무기계약직 3천593명을 제외하면 4천870명이다. 그러나 정규직 외 노동자는 7천320명이다. 자회사 용역노동자가 5천846명, 민간용역 노동자가 1천230명이다. 기간제를 비롯한 직접고용 비정규직이 226명 있다.

정 희망노조 지부장은 “국민에게 양질의 도로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실시간 지휘·감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이번 ITS 유지관리 용역노동자와 연이은 판결들에서 드러난 것”이라며 “도로공사는 이런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 항소를 포기하고 노동자의 고용안정에 힘쓰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정 지부장은 “과거 노동유연성을 강조하면서 처우와 노동환경이 열악한 노동자를 외주화하면서 지금과 같은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이 벌어졌다”며 “정부가 노동존중을 강조한 만큼 이런 문제를 바로잡는 데 더 힘써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