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미국에서는 바이든의 정책 이상으로 트럼프 유산 청산이 쟁점이다. 트럼프 시대가 그만큼 트라우마로 남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가 남긴 부정적 유산의 핵심은 민주주의 파괴다. 트럼프는 퇴임하는 순간까지 대선 결과에 불복했고, 심지어 국회의사당 침입을 응원하면서 민주주의 규범을 무시했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훼손했는가? 트럼프가 민주주의 제도를 직접 허물어뜨린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법으로 굳이 정하지는 않았지만, 민주주의 참여자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던 규범들을 그가 깡그리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가 헌법과 법률로만 작동되는 건 아니다. 주어진 권한을 민주적 이상에 맞도록 적절하게 사용하는 규범이 있어야 작동한다. 대통령제에서는 특히 대통령의 규범 준수가 중요하다. 하지만 트럼프는 대통령 권한을 전임자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용했다.
민주주의 규범을 무시하는 행동은 한국 사회에서도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다. 문재인 정부와 여당은 민주화 세력이라는 도덕적 우월감과 ‘적폐청산’이라는 대의를 앞세워 아무렇지도 않게 규범을 무시하고 있다.
트럼프가 4년간 했던 규범 파괴의 목록을 문재인 정부 시기의 행동들과 비교해 보자.
첫째, 트럼프는 취임 직후 임기가 끝나지도 않은 FBI 국장을 해임했다. 물론 대통령의 FBI 국장 해임이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이전까지 FBI 국장 해임은 양당 합의로 단 한 차례만 있었을 뿐인데, 수사기관과 대통령의 긴장 관계가 민주적 규범으로 인정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그의 러시아 스캔들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야당의 반대 속에서도 국장을 해임했다. 심지어 그는 스캔들 수사를 위해 설치된 특검 수사까지도 방해했다.
트럼프의 이런 사법 방해는 문재인 정부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됐다.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압력이 대표적 사례다. 청와대와 여당은 윤 총장이 대통령 측근들이 연루된 사건을 수사하자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를 해임하려 시도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지금껏 자제됐던 수사지휘권을 남발했고, 총장을 무시하고 검찰 인사를 단행했으며, 아예 상식에서 비상식적 근거로 징계까지 감행했다. 물론 이 모두는 불법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행정부가 준사법기관인 검찰에 가져야 하는 권한 자제의 규범을 파괴한 것이다.
둘째, 트럼프는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를 위협했다. 법원이 트럼프의 이민자 추방 정책에 반대하는 판결을 내리자, 백악관은 선출되지 않은 판사가 선출된 권력에 반대하는 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법원을 비난했다. 판결을 내린 항소법원을 해산하겠다는 협박도 했다. 그리고 인종차별적 수사로 기소된 애리조나 보안관을 사면해 사법부에 치졸한 보복을 가하기도 했다. 물론 이 또한 모두 불법은 아니었다.
친문으로 불리는 범여권의 정치인들도 트럼프와 비슷한 말을 여러 번 했다. 대표적으로 김두관 의원은 법원의 윤 총장의 징계효력 정지 결정에 대해 “법원의 판결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의 권력을 정지시킨 사법쿠데타”라고 비난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정권 관련 재판이 연속해서 열리는 시점에 느닷없이 전대미문의 판사 탄핵소추를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트럼프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법부에 대한 입법부의 권력 자제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규범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여론을 만들고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면, 얼마든지 법원을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는 전례를 만들었다.
셋째, 트럼프는 행정부 내부의 권력 감시를 부정했다. 독립적인 감사기구인 공직자윤리국이 트럼프의 비즈니스와 정부 운영이 이해관계 충돌을 일으킨다고 지적하자, 그는 정부개혁감독위원회를 움직여 담당 국장을 사퇴시켰다. 윤리국이 트럼프 측근인 환경보호청장의 비리 의혹을 제기했을 때는 아예 무시로 일관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바로 감사원이 월성1호기 폐쇄 과정에서 절차적 문제가 있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자 청와대와 여당이 일제히 감사원을 공격한 것이 그것이다. 여당 의원들은 감사원이 정부 정책을 평가할 권한이 없다고 감사 결과를 왜곡한 후, 최재형 감사원장을 사퇴시키려고 정치적 공세를 퍼부었다. 대통령이 청와대 특별감찰관을 아예 임명조차 하지 않은 것도 트럼프의 감사기구 무시 전략과 일맥상통한다.
마지막으로 트럼프는 국민의 투표권을 제약하고 선거를 왜곡했다. 그가 임기 중에 행동에 옮긴 가장 비민주적 처사는 공정선거대통령자문위원회를 만든 것이었다. 위원회는 미국 전역에 걸쳐 부정투표와 관련된 사례를 수집했고, 엄격한 유권자 신분확인법을 만들려는 공화당을 지원했다. 주 차원에서 선거명부를 정리하거나 확인하도록 압박하는 활동도 벌였다. 위원회의 목표는 명확했다. 민주당에 표를 몰아주는 저소득 소수 인종 유권자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었다. 스포츠에서도 게임 규칙을 참가자 다수의 동의 없이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트럼프는 아예 선거의 규칙을 바꾸는 방식으로 선거를 유리하게 만들려 시도했다.
트럼프의 행동이 선거 결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던 반면, 한국의 집권세력은 게임의 규칙을 바꿔 선거 결과를 바꿨다. 여당은 야당의 강력한 반발 속에서 패스트트랙으로 선거법을 개정했다. 불법은 아니었지만, 게임의 규칙이라 할 선거법은 항상 여야 합의로 처리했던 오랜 규범을 깬 것이다. 더욱 파렴치한 행동은 그 선거법의 공백을 악용해 선거에서 압승한 것이었다. 소수 정당을 배려한다는 취지를 무시하고 위성정당을 만들어 180석을 차지했다.
한국의 집권세력은 불법이 아닌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트럼프와 닮았다. 자신들의 행동이 반민주적이란 점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하버드의 저명한 두 정치학자가 쓴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는 대통령과 다수당의 권력은 자제돼야 하며, 법만이 아니라 민주적 규범도 존중돼야 민주주의가 잘 작동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졸저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는 민주적 규범을 무시하는 포퓰리즘이 어떤 방식으로 경제까지 망치는지 분석한다. 한국의 집권세력과 지지자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민주적 규범의 파괴가 어떻게 민생의 어려움으로 이어지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