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이 의결됐다. 정기훈 기자                                                                                                                                                                                                                 ▲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이 의결됐다.



21대 국회는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과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을 맞바꾼 국회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실업자·해고자의 노조 가입 허용은 대법원 판결과 국제사회 압박으로 불가피하게 개선할 수밖에 없었다면 탄력근로제·선택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는 노동시간 단축흐름에 역행하는 재계의 숙원을 국회가 받아들인 결과로 볼 수 있다.

탄력근로제·선택근로제 확대로 노동시간단축 무력화

국회는 9일 오후 본회의를 열고 ILO 기본협약 비준과 관련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공무원노조법)·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교원노조법) 개정안, 노동시간 규제를 완화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날 새벽까지 이어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법안심사소위와 전체회의를 통과한 법안들이다.

국회를 통과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에는 ILO 기본협약과 관계없는 노동시간 관련 내용이 담겼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선택근로제 정산기간을 확대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 도입·시행은 사업장 규모별 단계적으로 적용하기로 하는 한계가 있었지만 야근과 주말 출근이 일상화한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2018년 7월부터 시행했지만 유예기간은 길었다. 게다가 정부는 재계 의견을 받아들여 처벌유예(계도) 기간을 줬다. 재계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현행 최장 3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특정 주에 최대 64시간(40시간+연장근로 12시간+추가 연장근로 12시간) 일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얘기다. 재계 요구는 정부를 거쳐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넘어간 끝에 6개월 단위 탄력근로제 신설이라는 사회적 합의로 이어졌고, 이날 환노위에서 근기법 개정으로 현실화했다.

탄력근로제는 주 52시간제를 무력화하는 사용자의 무기로 꼽힌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시행령에 따르면 과로사로 불리는 뇌심혈관계질환은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을 초과하거나, 발병 전 1주 평균 64시간을 초과하면 산재로 인정한다. 6개월 단위 탄력근로제를 적용하면 6개월 연속 매주 64시간까지도 일을 시킬 수 있다. 과로사를 부추기는 근기법이 탄생하게 된 셈이다.

연구개발 업무에 한해 선택근로제 정산기간을 3개월로 확대하는 개정은 사회적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내용이다. 선택근로제는 일정 기간 단위로 정해진 총 노동시간 범위에서 하루 노동시간을 노동자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제도다. 정산 기간의 평균 연장근로시간이 1주 12시간을 넘지만 않으면 무제한 노동을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재갑 노동부 장관도 6월 언론 인터뷰에서 “(선택근로제 단위기간을) 3개월로 확대하면 근로자가 자율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제도라기보다 주 52시간제를 회피하는 형태로 악용될 소지가 많다”고 우려했다.

선택근로제 정산기간 확대 요구한 재벌이 승자

연구개발 업무만 3개월로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노동부 재량근로제 운영 가이드라인에 따른 ‘신상품·신기술 연구개발’ 업무는 “재료, 제품, 생산·제조공정 등의 개발 또는 기술적 개선 등을 말하며, 제조업에서의 실물제품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 게임, 금융상품 등 무형의 제품 연구개발 등을 포함”한다. 범위가 엄청나게 넓다. 전기·전자·통신·반도체·자동차 등 대기업 주력 산업에 두루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의 입김이 먹혔다는 증언도 나온다.

탄력근로제·선택근로제는 근로자대표와 회사가 합의해야 현장에서 실행할 수 있다. 노조가 없거나, 과반수노조가 없는 사업장에서 실체가 불분명한 근로자대표가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사례가 속출할 우려가 크다. 근기법을 개정해 근로자대표의 지위와 활동 등을 구체화하는 후속 입법이 늦어질수록 노동자가 입는 피해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월16일 경사노위에서 노사정이 근로자대표제 개선을 합의하기도 했다.

노동계는 노동시간 유연화 입법이 이뤄진 것에 반발했다. 민주노총은 “저임금 노동구조를 더욱 고착시키고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이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국노총은 “지난해 경사노위 사회적 합의에도 없는 내용(선택근로제)이 입법됐다”며 “주 최대 52시간제가 무력화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재계는 내색하지 않지만 기쁜 모양이다. 전경련과 한국경총은 각각 이날 입장문을 내고 ILO 기본협약 비준 관련 노조법 개정을 비판했다. 하지만 노동시간 유연화와 관련한 근기법 개정에 대해서는 약속이나 한 듯 아무런 평가도 내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