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속한 재해보상 차원에서 발생빈도가 높은 6대 근골격계질환에 ‘추정의 원칙’이 도입됐지만 산재신청부터 승인까지 걸리는 기간이 여전히 긴 탓에 노동자들이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추정의 원칙은 작업기간·노출량 등에 대한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반증이 없는 한 업무상질병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 지연으로 도입 취지가 무색해진 만큼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제도 적용해도 산재인정까지 134일이나
18일 근로복지공단과 금속노조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근골격계질환 평균 산재처리 기간은 121.4일이었다. 2016년 76.5일에서 44.9일이 늘어난 것이다. 이는 근골격계질환 산재신청 건수가 늘어난 것과 무관치 않다. 근골격계 산재신청 건수는 2016년 5천244건에서 지난해 9천925건으로 4천681건이 늘었다. 지난해 전체 산재신청 건수가 14만7천512건인데 이중 6.72%가 근골격계 산재신청 건수였던 셈이다.
공단은 2019년 7월부터 자주 발병하는 6대 근골격계질환에 추정의 원칙을 적용했다. 경추간판탈출증(목)과 요추간판탈출증(허리)을 비롯해 회전근개파열(어깨)·반월상연골파열(무릎)·수군관증후군(손목)·상과염(팔꿈치) 6대 상병에 도입됐다.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면 현장조사를 생략하고 바로 질병판정위원회 심의를 거치도록 해 산재처리 기간이 단축되는 효과가 있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2019~2020년 근골격계질환 추정의 원칙 적용 건수 367건 가운데 승인 건수는 340건으로 승인율이 92.6%였다. 지난해 전체 근골격계질환 승인율(70.5%)에 비해 높다.
문제는 승인율이 높아도 본래 제도 도입 취지대로 산재처리 기간이 단축되는 효과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지난해 평균 산재처리 기간은 121.4일인데, A씨의 경우 134일이 걸렸다. A씨처럼 현대차 울산공장 구내식당에서 일한 B(53)씨도 오른쪽 무릎 연골이 파열돼 지난해 6월 수술을 받고 다음달 산재신청을 했지만 결과는 11월이 돼서야 나왔다. 반월상연골파열 역시 추정의 원칙을 적용받는 질병이지만 124일이 걸렸다. 개인병가를 내고 쉬던 B씨는 결국 업무관련성이 낮다는 이유로 불승인 판정을 받아 이달부터 현장에 복귀해 일을 하고 있다.
질병판정위 심의 지연 문제 그대로
“근로복지공단 직원이 확인, 패스트트랙 도입해야”
질병판정위 심의 지연 문제는 추정의 원칙 도입 당시부터 제기된 문제다. 현장조사가 생략되더라도 질병판정위 심의는 거쳐야 한다. 질병판정위 법정 심의기간은 20일이다. 하지만 2018년 업무상질병 처리기간은 평균 166.8일이었다.
산재처리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고통은 노동자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근골격계질환의 경우 직종, 근무기간(유효기간) 등 적용기준 등을 충족해야 한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산재를 신청해도 질병판정위 심의가 오래 걸리면서 제도 효과가 발휘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미향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사무국장은 “산재승인까지 치료비 등 생계난을 겪고 불안감 때문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치료효과도 반감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규칙 7조 개정을 통해 질병판정위 심의를 건너 뛰도록 하면 처리 기간이 2주 정도로 간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재보험법 시행규칙 7조에는 진폐·이황화탄소 중독증 등을 질병판정위 심의에서 제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울산산추련은 지난달 9일 근로복지공단 본부와 면담 과정에서 추정의 원칙이 적용된 6대 근골격계질환 산재심사 제도개선과 관련해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항의서한에는 △추정의 원칙 대상을 산재보험법 시행규칙 7조에 포함할 것 △대상 상병 확대 △대상 직종 확대 △운영 매뉴얼대로 운영할 것 등 내용이 담겼다.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장(직업환경의학전문의)은 “산재신청 건수가 늘어나고 승인율이 증가하는 추세 자체는 바람직하지만 행정적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아 심의 지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며 “질병판정위를 거치지 않고 공단 재해조사 담당자가 직접 업무상질병 여부를 확인하는 ‘패스트트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