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존중' 무색해진 ILO 기본협약 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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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담당자 댓글 0건 조회 1,627회 작성일 20-09-03본문
사업장 내 점거 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등 사안과 무관한 내용 담아
결사의 자유 제한한 정부의 노동조합법 개정안
1998년 6월, 국제노동기구(ILO)는 제86차 총회에서 ‘노동에서 기본 원칙과 권리에 관한 선언’을 하며 8개 기본협약(Fundamental Conventions)을 채택했다. 그중 대한민국이 비준한 기본협약은 4개에 그친다. ‘결사의 자유 관련 협약(87호, 98호)’과 ‘강제노동 관련 협약(29호, 105호)’은 ILO가 기본협약을 채택한 뒤 22년이 지나도록 비준하지 않았다. ILO, OECD 등 국제기구는 미(未)비준 핵심협약의 비준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특히 유럽연합(EU)은 한-EU FTA상 ILO 기본협약 체결 노력 조항을 근거로 2018년 12월부터 분쟁해결절차를 진행하며 정부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미비준 협약을 비준하기 위해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관련법 개정을 논의했다. 그러나 노사는 결사의 자유 협약 비준에 따른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정부가 공익위원안을 기초로 한 개정안을 20대 국회에 이어서 21대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현재 정부 개정안은 노사 모두에게 반발을 사고 있다.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노동계가 ‘노동 개악’이라고 말하는 반면, 경영계는 ‘노조 편파적’ 개정으로 본다. 정부의 노동조합법 개정안에 따른 쟁점은 ▲실업자·해고자의 노조가입 ▲노조 임원자격 ▲노조전임자의 급여지급 ▲교섭창구단일화제도 등이다.
① 실업자·해고자의 노조가입 허용
정부는 개정안에 제2조 제4호 ‘라목’ 단서를 삭제하는 내용을 담았다. 실업자·해고자의 노조가입을 제한한 조항이 기본협약 제87호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해고자·실업자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ILO의 원칙이다. ILO는 조합원의 자격을 노조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노조 권한을 위축시킬 수 있는 국가의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권고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산별노조는 물론, 기업별 노동조합에서도 실업자해고자를 조합원으로 받을 수 있다. 경영계는 해고자·실업자 등이 기업별 노조에 가입해 조합 활동을 하는 경우 대립적 노사관계는 더욱 악화될 거라 우려한다. 그러나 해고자실업자의 노조 가입 허용이 ILO의 기본 입장인 만큼, 정부가 경영계의 주장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다.
오히려 쟁점은 제2조 ‘제4호 라목’만 삭제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노동자와 사용자, 노동조합 등을 정의한 현행 노동조합법 제2조는 간접고용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등을 노동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민주노총은 이를 두고 “특고, 하청·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3권 보장이 통째로 누락”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김주환 서비스연맹 대리운전노조 위원장은 “특수고용노동자가 노조설립신고증을 교부받은 경우에도 사용자들은 노동자성 내지 노동조합의 존재를 부인하고, 법원 소송을 통하여 시간끌기로 대응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의 지위를 온전히 보장받으려면 제2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② 노동조합 임원자격 제한
현행 노동조합법은 “노동조합의 임원은 그 조합원 중에서 선출되어야 한다”며 노동조합의 임원자격을 조합원으로 제한하고 있다. 반면 ILO 기본협약 제87호는 “근로자단체 및 사용자단체는 규약과 규칙에 따라 자유로이 대표자를 선출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조합원 임원 자격을 조합원으로 한정하는 규정이 동 협약에 위배된다고 보고 해당 규정을 폐지할 것을 우리나라에 지속적으로 권고한 바 있다.
정부는 개정안에 노동조합의 임원자격을 노동조합 규약으로 정하도록 하되, 기업별 노동조합의 경우 임원이나 대의원은 종사자인 조합원만 가능하게 했다. ILO의 권고를 고려하여 노동조합 임원의 자격을 개별 노동조합이 규약으로 자유롭게 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되, 기업별 노동조합의 경우에는 노사 간의 원활한 교섭 진행을 위하여 임원 및 대의원의 자격을 종사근로자인 조합원으로 제한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개별기업의 사정을 잘 모르는 외부인이 임원에 선출될 경우 노사 간 원활한 교섭 등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경영계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해고자, 실업자가 노조임원을 맡게 되면 대립적 노사관계가 더욱 악화될 것이라 봤다. 실상 실업자·해고자가 기업별 노조의 임원·대의원이 될 수 없도록 한다는 점에서 현재와 달라질 것이 없다. 이에 양대 노총은 정부 개정안이 ‘노조 임원의 자격 조건은 노조 자율에 맡길 사항’이라는 ILO 권고에 위배된다고 반발했다. 국회입법조사처도 “‘규약과 규칙에 따라 자유로이 대표자를 선출할 수 있다는 결사의 자유 원칙’에 위반될 소지를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③ 노조전임자의 급여지급
정부는 노조전임자의 급여지급 금지조항, 그리고 노조전임자의 급여지급을 위한 쟁의행위 금지조항은 삭제한다고 했다. 노조전임자의 급여지급에 대한 국가의 입법적 개입을 부당하게 보는 ILO 기본협약을 따른 것이다. ILO는 노조전임자의 급여지급을 법적대상이 아니라 당사자가 자유롭게 임의적으로 교섭하는 사항으로 규정해, 노조전임자의 한국 정부에 급여지급 금지를 폐지하라고 권고해온 바 있다.
더불어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를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이관함으로써 노사가 중앙교섭 창구를 통해서 근로시간면제한도를 정하도록 했다. ILO 결사의 자유원칙에 부합하도록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근로시간면제한도를 초과하는 내용의 단체협약이나 합의를 무효로 하고, 한도를 초과하여 급여를 지급할 경우 부당노동행위로 규정해 처벌하는 내용을 담았다. 노조전임자 급여지급에 국가가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ILO 권고에 저촉될 소지가 있다. 또한 노조전임자의 급여는 ‘투쟁의 결과’로 보는 노동계의 의견에도 배치된다.
④ 노동계 반대에도 교섭창구단일화제도 여전
양대 노총이 노동3권을 저해한다며 폐지를 요구했던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는 실상 그대로다. 현행 교섭창구단일화제도(「노동조합법」 제29조의2)에 따르면 하나의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2개 이상인 경우, 교섭대표 노동조합을 정해 교섭해야 한다. 예외 조항을 통해서 사용자가 원할 경우 노동조합 별로 개별교섭이 가능하게 했으나, 결국 교섭노조 선택권은 사용자에게 있다.
정부가 내놓은 개정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개별교섭 시 ‘성실교섭 및 차별금지 의무’를 규정했으나, 사용자가 동의한 경우를 전제로 한다. 교섭창구단일화제도를 현행처럼 유지하자는 경영계의 요구가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그간 양대 노총은 ▲소수노조의 노조로서의 기능을 봉쇄한 점 ▲창구단일화절차를 거치지 않은 노동조합을 타임오프와 쟁의행위 등 노동조합활동에서 배제한 점 ▲사용자가 노조를 선별하여 교섭에 응하는 방법으로 노조파괴 및 어용노조 육성책으로 악용되는 점을 들어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 폐지를 요구해왔다.
현행 교섭창구단일화제도는 ILO 기본협약에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ILO는 대표 노조 결정시 객관적이고 정확한 기준을 정해서 편파성을 피하고, 요건을 충족하는 대표노조가 없을 경우 단체교섭권은 모든 노조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ILO 협약은 그 자체로 사회적 합의안
ILO 협약은 노동계의 일방적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 각국 노사정이 논의해서 “세계의 항구적 평화”를 목적으로 내놓은 사회적 합의안이다. ILO 기본협약 비준과 그에 부합하는 법 개정은 단지 노동조합이나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건 아니다. “어떤 국가가 인도적인 근로조건을 채택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른 나라들이 근로조건을 개선하려는 데 장애가 되므로, 체약당사국은 정의 및 인도주의와 세계의 항구적 평화를 보장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또한 이 전문에 기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의 국제노동기구 헌장에 동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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